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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금융 허브' 기회, 정부가 차버렸다

입력
2018.04.16 04:4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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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강도 규제ㆍ거래소 압수수색에

신규 계좌 꺼리면서 투자자 이탈

홍콩ㆍ미국 거래소에선 적극 유치

비트코인 원화 거래량 7%로 하락

빗썸 등 한국 업체들 순위 밀려

“외국 거래소 배만 불려준 꼴”

직장인 정모(33)씨는 지난달 홍콩 가상화폐 거래소인 ‘바이낸스’에 신규 계좌를 개설하고 국내 거래소에 보관 중이던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을 옮겼다. 정씨는 “이메일로 인증하면 돼 한국에서도 가입하기 쉬운데다 정부 압박이나 거래소 압수수색 같은 불안한 상황도 없어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정씨처럼 국내 거래소에 보유하고 있던 가상화폐를 해외 거래소로 옮기는 투자자는 한 둘이 아니다. 국내 가상화폐 거래소 관계자는 “12월 한 달 동안만 50만명의 국내 투자자가 바이낸스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이처럼 국내 가상화폐 투자자가 해외로 떠나며 전 세계 가상화폐 시장에서 한국 업체들의 위상도 급속도로 쪼그라들고 있다. 15일 가상화폐 정보제공 사이트 코인힐스에 따르면 전 세계 비트코인 거래량 중 원화의 점유율은 지난 1월 12%에서 최근 7%로 떨어졌다. 전 세계 가상화폐 거래량 대비 한국 비중도 같은 기간 26.5%에서 9.2%로 감소했다. 국내 한 달 거래액은 297조원에서 49조원으로 축소됐다.

국내 투자자의 해외 거래소 ‘망명’은 지난 1월 가상화폐 거래 실명제 시행 등 정부의 고강도 규제로 자금 유입이 차단된데다가 시중은행들이 거래소에 신규 가상계좌 발급을 꺼리면서 거품이 꺼진 게 가장 큰 원인으로 풀이된다. 거래소에 대한 잇따른 검찰의 압수수색도 투자자 이탈을 부추겼다. 검찰이 수사 대상 거래소 이름을 공개하지 않아도 일부 투자자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서 해당 거래소 정보를 공유하며 “거래소가 문을 닫기 전에 자금을 옮겨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 홍콩 바이낸스와 쿠코인, 미국 이더델타 등 일부 해외 거래소는 한국어 입출금 관리 시스템을 마련하는 등 적극적으로 국내 투자자 맞이에 나섰다. 바이낸스는 국내 거래소가 금지한 무료 코인 지급과 스포츠카 등 증정 이벤트를 내걸기도 했다. 현재 국내에서 거래가 가능한 해외 거래소는 20여곳이나 된다.

이처럼 국내 투자자들이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그간 세계 시장에서 상위권을 다투던 국내 거래소들은 순위권에서 밀려나고 있다. 가상화폐 통계사이트 코인힐스와 코인마켓캡에 따르면 국내 거래소인 업비트와 빗썸은 전 세계 거래소 가운데 거래량 기준 5,6위를 차지하고 있다. 국내에 가상화폐 광풍이 시작되던 지난해 11월 빗썸이 1위를, 비트코인이 사상 최고가(2,504만원)를 찍었던 지난 1월에는 업비트와 빗썸이 각각 1위와 3위를 차지했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대신 그 자리를 홍콩의 바이낸스(1위)와 중국의 후오비(2위) 등 외국 거래소가 차지하고 있다. 올 초 6~10위를 오가던 코인원, 코빗, 코인네스트 등은 10위권 밖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문제는 일부 해외 거래소의 경우 국내보다 투자자 보호 장치가 더 미흡하다는 데에 있다. 최근 코인익스체인지 등 일부 해외 거래사이트에선 입ㆍ출금이 수일간 지연됐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 원하는 시세에 매도와 매수를 할 수 없어 투자자들이 큰 피해를 보기도 했다. 투자자가 최장 1주일 뒤의 시세를 예측해 공매수 또는 공매도를 선택하고 결과에 따라 돈을 잃거나 따는 ‘마진거래’도 국내에선 도박행위로 규정돼 금지됐지만 비트멕스 등 일부 거래소에서는 가능하다.

한 가상화폐 거래소 관계자는 “정부가 ‘투기 진정’을 내세우며 국내 거래소 때리기에 나서고 있는 동안 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가 해외 거래소의 배만 불려준 꼴”이라고 지적했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도 “결국 국내 자산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을 정부가 부추긴 셈”이라며 “새로운 경제와 산업을 활성화시키고 한국이 디지털 금융의 중심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정부 스스로 차 버렸다”고 말했다.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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