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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열전] “축구는 머리로” 메시를 존재하게 한 그라운드의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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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를 재창조한 크루이프 감독
수비 제치는 크루이프 턴 창시자
선수 시절 발롱도르 3회 수상
지도자 변신 후엔 토털축구 완성
공간·위치 선정의 중요성 확립
바르셀로나 전설 과르디올라 발탁
유소년 육성시스템 위대한 유산
“크루이프는 축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처음에는 선수로, 그 후에는 감독으로.” -펩 과르디올라(맨체스터 시티 감독)-
역사상 최고의 축구 선수가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펠레(78ㆍ브라질)인가 디에고 마라도나(58ㆍ아르헨티나)인가를 놓고 갑론을박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축구인을 한 명 들라면 ‘네덜란드의 축구 천재’ 요한 크루이프(네덜란드)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선수 시절 ‘크루이프 턴’(수비수의 무게 중심을 앞쪽으로 이동시킨 뒤 순식간에 정반대로 돌아 나가는 동작)이라는 기술을 창시한 환상적인 테크니션이었다. 또한 토털축구를 완성한 뛰어난 지도자였고 축구의 지평을 넓인 혁명가이자 철학가였다.
지난 3월 24일이 2016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크루이프의 2주기였다. 크루이프가 1973년부터 5년간 선수로, 1988년부터 8년간 감독으로 생활했던 FC바르셀로나(스페인)는 그의 별세 직후 ‘축구를 다시 만든 사람(reinventor)’이라는 헌사를 보냈다. 영국에서 시작된 축구가 크루이프를 거쳐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다.
크루이프는 경기 전체를 바라보는 넓은 시야와 탁월한 개인기, 놀라운 체력과 스피드를 모두 갖춘 선수였다. 그가 축구 선수에게 필수적인 운동으로 여겨지는 장거리달리기를 끔찍이 싫어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크루이프 2주기에 맞춰 발간된 자서전 ‘마이 턴’에는 그가 아약스 1군 팀 시절 리뉘스 미헐(1928~2005) 감독이 숲 속 달리기를 시킬 때마다 나무 뒤에 숨어 다른 선수들이 반환점을 돌아올 때쯤 다시 합류하는 방식으로 꾀를 부린 일화도 나온다. 당시에는 축구의 9번이나 10번이 에이스의 상징이었는데 크루이프는 14번을 달고 그라운드를 누볐다. 크루이프가 1963년부터 1973년까지 선수로, 1985년부터 1988년까지 감독으로 몸 담았던 아약스(네덜란드)에서 14번은 영구 결번으로 지정돼 있다.
크루이프는 유럽 최고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발롱도르(1971ㆍ1973ㆍ1974년)를 3회나 수상했다. 리오넬 메시(31)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33)가 각각 5회씩 수상하기 전까지 최고 기록이었다. 크루이프가 속한 네덜란드 축구대표팀은 1974년 서독월드컵 결승에서 개최국 독일에 1-2로 패해 준우승에 그쳤지만 우승 팀 독일보다 센세이션을 몰고 온 네덜란드 축구를 기억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 크루이프는 4년 뒤 아르헨티나월드컵 본선은 뛰지 않았고 네덜란드는 또 다시 결승에서 개최국 아르헨티나에 져 준우승에 머물렀다. 크루이프는 아르헨티나월드컵에 출전하지 않은 이유가 그를 포함한 가족 모두가 괴한에 납치된 충격 탓이었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 고백했다.
지도자로 변신한 크루이프는 친정 팀 아약스와 바르셀로나 지휘봉을 잡아 미헐 감독이 구상했던 토털축구를 완성했다.
당시만 해도 축구에서는 ‘공격 따로, 수비 따로’가 당연하게 여겨졌다. 반면 크루이프는 골잡이와 수비수가 유기적으로 역할을 분담해 공간을 메우고 최전방부터 철저한 압박으로 상대 공격을 원천 봉쇄하는 전술을 폈다. 그는 전통적인 사고방식도 뒤엎었다. 스트라이커에게는 “네가 제1의 수비수”라고 했고 골키퍼에게는 “네가 제1의 공격수”라고 했다.
크루이프는 거리의 개념을 명확하게 정립한 지도자이기도 하다. 그는 “상대에게 5m의 공간을 주는 순간 우리는 그를 뛰어난 선수로 만들어준다. 반면 3m 거리에서 태클을 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렇게 하려면 발이 빨라야 하고 끊임없이 기어를 바꿔야 한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크루이프 드림팀’의 수준에 도달하면 1만 시간이 필요하다(자서전 ‘마이 턴’ 중)”고 강조했다.
좁은 지역에서 공간을 장악하려니 선수들 간 두뇌 플레이가 필요했고 여러 포지션을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훈련, 압박을 유지할 수 있는 체력도 필수였다. 크루이프는 그 전까지 그저 상상 속으로만 여겨졌던 전술을 팬들의 눈앞에 직접 펼쳐 보였다.
그는 1990년부터 4년 연속 스페인 프로축구 프리메라리가 우승을 달성해 바르셀로나 전성시대를 열었다. 8년간 바르셀로나에서 들어올린 우승 트로피가 11개다. 크루이프는 자서전에서 “바르셀로나 스타일은 거의 완성됐고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에 걸 맞는 결과를 내는 것뿐이었다. 우리는 추수를 하듯 노력에 대한 보상을 거둬들였다”고 썼다. 이런 그의 철학을 그라운드에서 가장 잘 구현한 선수 중 한 명이 지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시티 지휘봉을 잡고 있는 펩 과르디올라(47)다.
크루이프는 17세까지 바르셀로나 3군에 머물던 과르디올라를 1군으로 끌어올렸다. 과르디올라는 빠르지도, 운동 능력이 뛰어나지도 않았지만 공간과 위치 선정에 대한 이해가 탁월해 ‘크루이프 드림팀’의 수제자로 활약했다. 과르디올라는 선수 은퇴 후 바르셀로나 지휘봉을 잡은 뒤 토털축구의 정신을 계승한 ‘티키타카’(탁구공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일컫는 말) 전술로 한 시대를 풍미했고, 바이에른 뮌헨(독일)의 전성기를 이끈 뒤 잉글랜드로 건너가 올 시즌 맨체스터 시티의 우승을 눈앞에 두고 있다.
크루이프는 1996년 프리메라리가 우승에 실패한 뒤 바르셀로나 지휘봉을 내려놓았지만 영원히 남을 유산도 남겼다. 바르셀로나가 자랑하는 유소년 육성 시스템인 ‘라 마시아’(농장이라는 뜻)를 정비한 것이다. 과거 피지컬이 뛰어난 유망주만 선호했던 바르셀로나는 크루이프가 지금의 라 마시아 시스템을 정비한 뒤 리오넬 메시(31)를 비롯해 사비 에르난데스(38)와 안드레스 이니에스타(34) 등 세계 최고의 선수를 숱하게 배출했다. 영국 미러는 “크루이프가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부임하기 전에는 ‘라 마시아’가 무엇인지 아무로 몰랐지만 오늘날에는 모두가 안다. 메시는 크루이프가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크루이프는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이자 축구계에 큰 혁명을 일으킨 인물”이라고 극찬했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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