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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 8할은] '신과 함께' 제작자 "내 DNA엔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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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가정 형편이 조금 어려웠다. 페인트칠 시공 일을 하시는 아버지를 따라서, 일거리가 있는 곳으로, 자주 이사해야 했다. 그래서 전학도 무지하게 많이 갔다.
경기 성남에서 초등학교 세 곳을 다녔고, 5학년 때 부모님이 나를 서울로 ‘유학’ 보내면서 또 전학 갔다. 중학교 때는 가족이 서울로 이사하면서 중간에 집 근처 학교로 옮겼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서야 비로소 한군데 정착을 하나 싶었는데, 이번엔 학교가 퇴계로에서 강동구 둔촌동으로 이사를 가버렸다. 나를 두고 말이다. 별수 있나. 집 근처 다른 학교로 전학 갔다.
그러다 보니 어린 나에겐 요상한 강박과 불안 같은 것이 있었다. 언제 전학 갈지 모르니까 ‘초단시간’에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 나는 웃기고 재미있고 수다스러운 사람이 돼야 했다. 그 웃기고 재미있는 수다의 소재로 ‘만화’만 한 게 없었다.
만화에서 본 이야기를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늘어놓곤 했다. 내 마음대로 이야기를 각색하고, 서로 다른 이야기를 이어 붙이기도 하고, 때로는 인물이나 배경만 가져와서 새로 이야기를 지어냈다. 내 이야기엔 반전이 있었다. 지질한 주인공이 영웅적 활약을 하고, 선량한 인물이 악당으로 돌변했다. 입담 덕에 친구가 금방 생겼다. ‘되게 웃기는 놈’이라고 소문도 났다. 지루하고 따분한 자율학습 시간이면 친구들이 나를 불렀다. 교탁 앞에 서서 혼자 40~50분간 이야기하는 건, 나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그 시절 만화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어머니가 총채를 들고 만화방에 찾아 오신 적도 있다. 늦은 시간까지 나를 집에 안 보냈다고 만화방 사장님과 싸우기까지 하셨다. 만화방에 갈 돈이 없어서 아버지 지갑에 손을 댔다가 등짝도 많이 맞았다. 아버지가 술 한잔 걸치고 집에 오시면 취기에 이성이 마비된 허점을 노려서, 이미 받아간 육성회비를 또 받기도 했다. 나중에는 만화방 사장님과 협상을 해서 청소를 해주고 공짜로 만화를 봤다.
내가 특별히 좋아했던 장르는 대하 서사 드라마다. 그 무렵 친구들은 무협지를 읽었지만, 나는 액션과 무협에는 영 흥미가 붙지 않았다. 호흡이 길고 사건이 묵직하고 인간군상이 풍성한 이야기만이 나를 사로잡았다. 20~30권짜리 만화를 며칠이고 탐독했다. 고우영, 허영만, 이현세, 이상무, 이상세, 박봉성, 윤승은 등 1970~80년대 유명 만화가의 작품을 섭렵했다. 성경도 만화로 봤다. 삼국지는 고우영 만화로 접했다. 이현세의 ‘국경의 갈가마귀’는 너무 재미있어서 10번도 넘게 봤다. ‘며느리 밥풀꽃에 대한 보고서’ ‘공포의 외인구단’ ‘블루 엔젤’ ‘남벌’도 기억에 남는다.
연극영화과에 가고 싶었다. 영화 일을 꿈꾸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왠지 만화처럼 재미있는 전공일 것 같다는 이유, 딱 하나였다. 아들이 넥타이 메고 농협에 다니길 바랐던 아버지가 ‘딴따라 될 거면 집 나가라’고 호통을 치셨다. 어쩔 수 없이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다. 그나마 연극영화과와 가장 비슷해 보이는 전공이었다.
대학 졸업한 뒤로도 영화와는 무관한 일을 했다. CF 감독이 되려고 광고회사를 다녔다. 2년쯤 지나자 일상이 지루해졌다. 일이 재미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글이 쓰고 싶어졌다. 시나리오라고는 구경도 못 해 본 내가 시나리오 한 편을 썼다. 모니터 삼아 광고계 친한 선배에게 보여줬다. 마침 그 선배의 사촌동생이 강우석 감독의 조감독이었다. 영화 ‘투캅스’를 끝내고 감독 데뷔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내 시나리오는 선배를 거쳐 그 사촌동생에게 갔고 이윽고 제작자에게까지 건네졌다. 그 제작자도 자신의 영화사를 꾸려서 창립작을 찾고 있었다. 그 즈음 삼성영상사업단이 출범했다. 감독, 제작자, 투자사를 만난 내 시나리오는 1995년에 영화로 만들어져 세상에 나왔다. 그 영화가 ‘돈을 갖고 튀어라’다. 원동연의 시나리오 데뷔작, 김상진의 감독 데뷔작, 제작자 차승재의 우노필름 창립작, 삼성영상사업단의 창립작이다.
만화가 나를 영화로 이끌었다. 서사 작법, 기승전결 구성, 캐릭터 설계, 이미지 구상 등 영화를 만들 때 필요한 모든 걸 만화에서 배웠다. DNA에 아예 박혀 있다. 만화를 달리 보면 그 자체로 콘티북이기도 하다. ‘돈을 갖고 튀어라’가 시나리오 데뷔작이자 은퇴작이 됐고, 이제는 제작 일만 하지만, 나는 시나리오 회의 때 누구보다 아이디어를 많이 낸다. 만화에서 익힌 ‘변칙’으로 이야기를 짠다. 이미지를 상상하면서 신나게 이야기를 풀어내면 때때로 동료들이 살짝 구박도 한다. “아이디어는 좋은데 그걸 연기로 표현하지는 말라”고. 연기는 아주 못 봐주겠나 보다.
서른일곱 살에 영화사를 차렸다. 창립작 ‘마지막 늑대’가 쫄딱 망했다. 그 뒤로도 계속 망했다. “대학까지 졸업시켜 놨더니 초등학교도 못 나온 아버지의 등골을 빼먹는다”며 “기생충 같은 놈”이라고 늘 혼나고 살았다. 처음 ‘성공’이란 걸 경험한 게 마흔세 살 때였다. 그 영화가 ‘미녀는 괴로워’다. 그러고 보니 ‘미녀는 괴로워’의 원작이 만화다. 최근 만든 ‘신과 함께-죄와 벌’도 웹툰 원작이고. 내 만화 사랑은 여전히 뜨겁다. 요즘에도 웹툰을 즐겨본다. ‘신과 함께-죄와 벌’이 아시아 국가들에서 사랑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K웹툰을 세계에 알렸다는 사실이 가장 기뻤다.
제작자로서 ‘필생의 역작’으로 도전하고 싶은 만화가 있다. 허영만의 ‘각시탈’과 ‘오! 한강’, 이현세의 ‘남벌’이다. ‘남벌’의 경우엔 영화화 제안을 받은 적도 있다. 방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2시간짜리 영화에 담아낼까. 상상만 해도 설렌다. 언젠가 관객들에게 꼭 영화로 보여주고 말겠다.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의 말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 했습니다.>
정리=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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