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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미래에서 온 이야기] 유토피아냐 디스토피아냐, 현대인의 행동이 미래를 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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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각종 차별에 맞선 마지 피어시
인권침해ㆍ환경오염ㆍ전쟁 등
당대의 문제의식 작품에 결합
대표적 페미니즘 작가 꼽혀
대표작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
라틴계 빈곤층 여성 주인공으로
페미니즘 공통적 발전방향 보여
소설 19권 시집 20권 출간하고
전국 대학서 시ㆍ여성 주제 강연
아서 C. 클라크상 수상하기도
마지 피어시는 SF 작가로는 낯선 인물이다. 그녀가 주로 활동한 영역이 기존 미국 SF 장르와는 궤를 달리했기 때문이다. 피어시는 전쟁과 빈부격차,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횡행하는 한복판에서 자라나 일찍부터 사회운동가로 투신했으며, 자신을 ‘글을 쓰고 있지 않을 때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정치적 작가’라고 소개한다. 피어시의 작품은 인권 침해나 환경오염, 전쟁 등 당대의 문제의식이 작품 속 세계와 합일을 이룬다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그녀는 여성의 삶이라는 주제를 일관되게 조명했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페미니즘 작가로 꼽힌다. 피어시는 류머티스 열을 앓은 어린 시절 책을 보면 다른 세계가 있다고 느껴서 책을 좋아하게 됐다고 밝힌 바 있는데, 그 말대로 그녀는 집필을 통해 다른 세상을 만들어왔다. 가상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SF가 실제 사회에 의미가 있는지, 픽션에 불과한 소설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피어시의 삶과 글은 바로 이를 증명한다.
“이길 때까지는 져야 하는 법이에요”
마지 피어시는 홀로코스트가 한창이던 1936년, 양극화와 인종차별로 악명 높은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가난한 유대계 노동자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피어시의 외할머니는 전통에 충실한 유대인이었으며 외할아버지는 노동운동가로서 제빵사 노동조합을 조직하던 중 살해당했다. 피어시는 자신의 사회문화적 뿌리를 예민하게 의식하며 자랐고, 미시간 대학교 장학생이 되면서 가족 중 최초로 대학 교육을 이수했다. 그리고 자신 같은 취약한 이들이 겪는 부당함을 판별하는 눈과 이를 일깨우는 정연한 언어를 갖췄다. 그녀는 열성적인 집필 활동으로 촉망받는 대학생 작가에게 수여하는 홉우드 상을 여러 번 수상했으며, 프랑스 유학과 석사 학위를 마쳤다.
피어시는 가난, 질병, 불안정한 삶과 짙은 피부색이 긴밀하게 결합한다는 점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그녀의 글에서는 병원이나 감옥에 붙잡힌 사람들이 온통 흑인과 멕시코계인 것, ‘흐린’ 피부색의 배우자를 얻는 게 그들의 사회적 성공에 포함된다는 것 등 다양한 사례가 묘사된다. 인종, 계층, 성별은 다층적이고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피어시 자신도 겹겹이 무력한 위치를 감내해야 했다. 그녀는 짧은 첫 결혼 생활 후 23살에 이혼 경력이 있는 극빈 여성이 되었다. 남편이 그녀가 글쓰기를 취미로만 유지하고 일반적인 성역할에 부응하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비서나 계산원, 파트타임 강사 등 여성에게 주어지는 임시직 일자리를 전전하며 계급과 여성 문제의 당사자로서 식견을 쌓았다.
이후 피어시는 불합리한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해 헌신했다. 1960년대에 미 중앙정보국(CIA) 및 권력 구조를 연구했으며, 북미 지역 라틴계 사람들을 위한 비영리단체 북미라틴아메리카회의(NACLA) 설립에 기여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 연합(SDS)에서 뉴욕 지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새로운 페미니즘 물결에 합류해 본격적으로 여성운동을 시작했으며, 1977년에는 비영리 출판단체 언론의 자유를 위한 여성 연구기관(WIFP)의 일원이 되었다. 동시에 사회적 관심을 적극 반영하는 시를 지속적으로 발표하며 다수의 문학상을 받았다. 베트남전 반대 운동을 담아낸 소설 ‘입대’(1988)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로 꼽히며 피어시가 명망 있는 작가로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힘 있는 자들은 혁명을 이루지 못하죠”
마지 피어시의 소설 중 국내에 번역된 책은 미국 페미니즘 SF 걸작으로 꼽히는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1976)이다. 사이버펑크 SF의 선도자로 유명한 윌리엄 깁슨은 이 소설을 사이버펑크의 출생지라고 평했다. 이제는 익숙한 소재인 인간과 기계의 결합, 현실을 침범하는 가상현실, 강렬한 시각적 형상화를 전면에 내세운 초기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무엇보다 여성이 처한 끔찍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포착했다는 점에서 놀라운 작품이다. 그리고 이미지와 시를 혼용하며 변화를 향한 굳건한 의지를 표명하는 아름다운 소설이기도 하다.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는 1970년대에 본격 개화한 유토피아 SF에 속한다. 19세기와 달리 70년대 유토피아 소설은 페미니즘과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기존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에서 벗어난 세계를 그린다는 점이 특징이다. 작중 라틴계 빈곤층 여성 코니는 뛰어난 수용 능력을 통해 미래에서 온 루시엔테의 신호를 수신한다. 1970년대의 코니와 2130년대의 루시엔테는 정신적 연결을 통해 서로의 시대에 체현한다. 소설은 코니의 시간여행을 통해 이상적인 미래상을 제시하고 현재 사람들의 행동으로 미래가 디스토피아로 바뀔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소설의 ‘현재’인 1970년대는 지금 와서는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다. 당시는 뇌과학과 유전자조작 기술이 대두되면서 인간을 인위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기대가 커져, 암암리에 인체 실험이 행해졌다. 실제로 CIA가 주도하여 교도소 수감자 3명에게 비인도적 수술을 한 사실이 드러나 큰 파장을 일으켰다. 정신병원에서는 전기자극과 전두엽 절제술이 환자의 정신을 치료하는 기술로 각광받았다. 작중 코니는 ‘미친년’이고 ‘폭력적’이라는 낙인을 받고 강제로 투약과 실험을 당한다. 뇌엽을 제거하는 수술은 1970년대 말이 되어서야 전 세계적으로 금지되었다. 일반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코니는 하혈 때문에 찾아간 병원에서 담당 레지던트가 실습을 원했다는 이유로 강제로 자궁 적출 수술을 받는다. 마지 피어시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실제 수감됐던 이들을 인터뷰하고 관련기관에 잠입하며 자료를 모았다. 소설은 당대의 의학과 과학이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취급했는지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흥미로운 증상의 환자가 있으면 모든 의사와 레지던트가 한 번씩 볼 수 있도록 복부 절제 수술과 직장 수술을 연이어 일고여덟 번이나 실시하고도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한편 1970년대는 여성 작가들이 운동의 차원에서 소설을 창작한다는 연대의식을 지니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피어시가 그린 유토피아는 성평등에 기반한 진실한 존중이 핵심이다. 메타포이세트에선 타인을 그나 그녀가 아닌 ‘그 사람’으로 칭하며, 남편과 아내 대신 '베개 친구', '손 친구', '정인'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게다가 이 소설은 여성주의 사조의 쟁점을 고스란히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제1물결이라 불리는 초기 페미니즘은 성별에 관계없이 동등한 권리를 확립하고자 했고, 여성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영역에 종사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반대 측은 그런 주장이 남성과 합리성을 우월시하며 남성중심주의를 영속화하기 때문에, 여성의 고유한 속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대립은 제2물결과 제3물결을 통해서도 유사하게 반복되었으며, 코니와 루시엔테의 견해 차이에도 드러난다. 미래 사회에서 출산은 기계가 담당하며 양육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한 아이당 3명의 ‘어머니’가 맡는다. 수염이 성성 난 남자도 ‘어머니’로 자원하여 모유 수유를 한다. 루시엔테는 여성과 출산의 단절을 해방으로 파악한다. “생물학적으로 속박되어 있는 한 우리는 절대로 동등해질 수 없어요.” 반면 코니는 이들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권력의 마지막 유산, 피와 젖으로 봉인된 소중한 권리를 남자들이 훔쳐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고 느낀다.
여기에는 정답이 없지만, 코니와 루시엔테가 불일치를 겪고 또 성장하는 모습은 페미니즘의 공통된 발전 방향을 보여준다. ‘여성의 경험’은 심지어 한 개인 안에서도 제각각으로 나뉜다. 코니는 자신을 멕시코계 여자 콘수엘로, 용케 대학에 간 코니, 감옥과 정신병원에 가는 형편없는 콘치타라는 세 사람으로 느낀다. 그러나 한편 전혀 다르다고 여겼던 여자들이 단지 진정제, 각성제, 안정제에 찌들었을 뿐 별다를 바 없이 살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계층이나 인종 같은 차이는 성별 요인을 통해 극대화되기도 하고 무의미하게 변하기도 한다. 이 뒤로 이어지는 것은 연대의식이다. 코니는 역경에 굳건하게 대처하는 루시엔테를 보며 남자답다고 느끼기보다 자기 가족의 지주였던 외할머니를 떠올린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그녀와 같은 전쟁을 벌이는 당사자라고 깨닫는다.
사람이 꼭 해야 할 일
루시엔테는 반복해서,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사람이 꼭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지 피어시는 글쓰기의 힘을 믿은 여성 작가로서 자신이 할 일을 했다. 그녀는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를 한층 발전시킨 ‘그, 그녀, 그것’(1991)으로 아서 C. 클라크상을 수상했고, 이외에도 미국도서관협회상과 다수의 문학상을 받았다. 그리고 전국의 대학과 기관 및 콘퍼런스에 기꺼이 참석하며 주로 시와 여성에 관해 강연했다. 여성작가의 시를 알리기 위해 ‘이른 성숙: 미국 여성시의 현재’(1988) 앤솔로지를 엮었고, 유대인으로서 ‘티쿤 매거진’의 시 부문 편집자로 활동했다.
그녀는 작가로 자리매김한 80년대에는 희곡과 소설을 공동 집필했던 사이인 아이라 우드와 결혼하여 뜻을 함께할 동지 겸 가족을 얻었다. 두 사람은 비영리 교육단체 오메가에서 수년간 강의한 경험을 토대로 ‘글을 쓰고 싶으시다고요’(2001)를 공저했으며, 함께 출판사 ‘리프로그(leapfrog press)’를 설립했다. 리프로그는 안타깝게 출간 기회를 놓치거나 충분히 주목받지 못하고 잊힌 책이 알맞은 독자에게 닿도록 이를 발굴하고 홍보하는 곳으로, 소규모 지역 출판사로는 드물게도 전국 매체의 관심을 받았다.
마지 피어시는 19권의 소설과 20권의 시집, 5권의 논픽션을 출간하고 명예 학위를 포함해 4개의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녀는 활동가로서든 작가로서든 장기간 생존하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축하할 일은 무엇이든 축하하며, 일 때문에 떠날 때를 제외하면 휴양지로 유명한 케이프코드에서 남편 및 고양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
마지 피어시 (1936.3.31 ~ 현재)
1936년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나 노동자 가정에서 자랐다. 미시간 대학교에서 장학생으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훗날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0년대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 연합(SDS)와 뉴레프트에서 활동가이자 페미니스트로 활약했으며 베트남전 반대 운동을 펼쳤다. 1971년 케이프코드로 이주한 후 본격적으로 여성운동에 관심을 기울였고, 1982년 오랜 동료였던 아이라 우드와 결혼해 집필 및 출판 작업을 함께했다. 소설, 시, 희곡, 회고록을 냈으며, 사회운동가이자 작가로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심완선ㆍSF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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