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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미래에서 온 이야기] 재난의 공포가 상상력을 키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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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일본침몰’의 작가 고마쓰 사쿄(小松左京)
한국에서 21세기에 태어나 지금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세대의 집단심리를 연구해 보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것이다. 특히 일상에서 느끼는 자연재난에 대한 공포나 불안은 그 전 세대들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일 것이 틀림없다. 결정적으로 지진이 그렇다. 2016년과 2017년에 연이어 일어난 경주 지진과 포항 지진은 그전까지 해외 뉴스에서나 접했던 지진이라는 재난의 심각성을 바로 피부로 느끼게 해주었다. 21세기 세대에게 지진이란 언제든 들이닥칠 수 있는 살아있는 공포라는 사실이 청소년기의 뚜렷한 기억이자 집단 트라우마로 각인된 것이다. 한국의 20세기 세대들에겐 어린 시절에 그런 트라우마가 없다.
그런데 이웃 일본은 완전히 다른 처지다. 누구나 지진 불안을 늘 안고 살아야 하는 숙명을 타고 났다. 그래서인지 지진을 포함한 각종 재난들을 문화적 스토리텔링으로 수용하는 깊이와 폭도 훌륭한데, 사실 그 모든 시뮬레이션 시나리오들은 하나의 문학작품이 끼친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대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고마쓰 사쿄(小松左京)의 장편소설 ‘일본침몰’(1973)이다.
재난과 파멸을 그리는 냉정한 상상력
일본 열도 아래의 지각에서 심상찮은 조짐이 계속 포착된다. 데이터를 끌어 모아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돌려 본 결과 일본은 역대급 대지진이 빈발하다 2년 정도면 열도 대부분이 바다 밑으로 잠긴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온다. 이때부터 일본 정부는 비밀리에 대응 계획을 짜기 시작하지만, 그나마 살아남을 얼마 안 되는 자국민을 위한 해외 임시정부 매뉴얼 수준이다. 일본침몰을 처음 예측한 과학자는 TV에 나갔다가 망나니짓을 해서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위기에 처하는데, 사실은 일본이 침몰할 거라는 정보를 슬쩍 흘리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다. 한편 정부는 전면 개각을 단행하면서 새로 임명하는 대신들을 모두 해외 경험이 풍부한 국제통으로 교묘히 배치하고, 어느 때부터인가 국민들 사이에서는 ‘세계웅비(世界雄飛)’라는 캠페인이 퍼져나간다. 얼마 뒤 닥치기 시작한 지진들. 격렬한 지각 활동은 후지산을 포함해 자고 있던 화산들까지 분화시키며 예상보다 훨씬 빠른 진행을 보인다.
‘일본침몰’은 작가 고마쓰 사쿄가 9년여에 걸친 구상과 자료조사 끝에 완성한 역작으로서, 1973년에 상, 하 두 권으로 출간된 뒤 합쳐서 380만 부가 넘게 판매되는 기록을 세웠다. 고마쓰 사쿄는 단숨에 일본 문단 내 고액납세자 순위 5위에 올랐다고 한다.
이 작품이 감탄스러운 점은 미증유의 대재난을 앞둔 한 나라의 과학기술, 정치, 경제, 사회, 외교, 기타 관련된 모든 분야를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으로 꼼꼼하게 묘사해서 엄청난 설득력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늘 대지진의 위협에 시달리던 당시의 일본인들 사이에서 이 책은 마치 신드롬처럼 열독 현상을 불러일으켰고 소설의 내용을 사실로 믿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작가는 문학을 전공했음에도 과학자의 자문을 얻어 ‘지구물리학 석사 논문 수준’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과학적 정합성을 심어 넣었고,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억울하게 학살된 사건을 상기시키며 사람들의 집단적 야만성이 드러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담았다.
자연 앞에 인간은 여전히 무력한가
‘일본침몰’은 지난 45년 동안 한국어판이 10종 가까이 출판되었지만 요즘 사람들은 2006년에 개봉한 영화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의 해피엔딩과는 달리 원작은 철저하게 재난 일변도로 막을 내리는 전개이다. 일본 열도는 결국 다 가라앉고, 간신히 탈출한 사람들 중 주인공 그룹이 시베리아 행 밤기차에 타고 있는 모습이 마지막이다.
기본 설정에 대해서 먼저 말하자면, 실제로 일본 열도가 가라앉을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라고 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일본은 오히려 아주 조금씩 솟아오르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2011년에 도호쿠(東北)대지진과 그로 인한 지진해일(쓰나미),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는 악몽인 후쿠시마(福島)원전 사태를 겪었다. 당시 방송 화면을 보면서 반사적으로 ‘일본침몰’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실제로 해일에 잠긴 육지의 사진을 1면에 크게 싣고는 ‘일본침몰’이라고 표제를 단 국내 일간지가 둘이나 있었다.
일본인들이 지닌 재난 트라우마는 사실 지구상에서는 유일무이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지진이나 화산 같은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원폭을 맞은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의 재난에 대한 태도는 인위적으로 초래된 것까지 포함해서 뭔가 애증이 교차하는 양가적인 모습으로 드러날 때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고지라’이다. 미군이 실시한 해저 수소폭탄 실험의 여파로 깨어난 고지라가 일본에 상륙하여 쑥대밭을 만든다는 것이 1954년에 나온 원조 영화 ‘고지라’이다. 그런데 후속편이 계속 이어질수록 등장하는 고지라는 오히려 일본 관객들의 응원을 받으며 다른 나쁜 괴물들과 맞대결을 벌인다. 고지라가 일본인들의 피폭에 대한 피해의식을 상징하는 일종의 현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일본 SF문학의 무게중심을 지킨 작가
일본의 전후 SF문학 1세대 대표 작가로 흔히 세 사람을 꼽는다. 호시 신이치(星新一ㆍ1926~1997)와 고마쓰 사쿄, 그리고 츠츠이 야스타카(筒井康隆ㆍ1934~). 호시 신이치는 ‘쇼트 쇼트 스토리’로 알려진 특유의 초단편 소설들을 1,000편 넘게 내놓아서 일본의 국민 작가로 추앙받는 사람이고, 츠츠이 야스타카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 같은 작품도 있지만 원래는 특유의 신랄한 블랙유머로 정평이 난 풍자문학의 대가이다. 이 둘의 작품은 국내에도 상당 부분 소개된 반면, 고마쓰 사쿄는 ‘일본침몰’을 제외하면 사실상 우리 독자들이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저작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 셋 중에서 가장 정통적인 SF에 충실하면서 문학적 역량 또한 뛰어났던 작가라면 고마쓰 사쿄를 꼽는 데 주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우주에서 인간의 위상이나 의미, 가능성 등을 추구하는 SF 본래의 정신에 가장 충실하게 복무하는 작가였고 또한 언제나 성실하게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그런 그를 두고 어떤 평론가는 ‘아라마타 히로시(荒俣宏ㆍ박학다식으로 유명한 작가)와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를 합친 다음 셋으로 나누지 않은 상태’라는 극찬을 하기도 했다.
그가 오래 전 공들여 내놓았던 ‘일본침몰’은 상시적 지진에 불안해하는 일본인들에게 심리적 백신이나 마찬가지였고, 그 약효는 세대를 넘고 사회 영역을 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아득한 시공간 구석구석을 사색하는 수 십 권에 달하는 다른 저술들 역시 세대를 이어 오며 일본인들의 상상력을 키우는 데에 변함없이 기여한다. 일본 문화의 저력이란 분명 고마쓰 사쿄 같은 작가가 있기에 더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박상준ㆍ서울SF아카이브 대표
고마쓰 사쿄(小松左京) 1931년 1월 28일 ~ 2001년 7월 26일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약학전문학교를 다니던 중에 도쿄(東京)의 전통 약초 가게의 딸이었던 모친과 결혼했고, 그 뒤 전공을 살리는 대신 오사카에 금속가공소를 차렸다. 고마쓰는 2차 대전이 끝날 때 14세 중학생이었는데, 자신과 같은 나이의 어린 청소년들이 오키나와(沖繩)에서 많이 죽어간 사실을 알고 부채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이것이 문학과 특히 미래 SF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교토대학에서 이탈리아문학을 전공했으며 원폭에 대한 반감에서 반전 평화를 주장하는 일본공산당에 입당해 활동하다가 소련도 핵개발에 나선 것을 알고는 탈당한 이력도 있다. 졸업 뒤에는 희극 만담 작가, 경제지 기자 등 다양한 일을 경험했다.
1959년 말에 창간된 일본 잡지 ‘SF매거진’을 읽고 미국식 SF의 창작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1961년부터 시작된 SF콘테스트에 연이어 입선하면서 본격적인 SF작가의 길을 걷는다. 1963년에 일본SF작가클럽에 창립멤버로 참여했으며 80년대 초에는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68년에는 일본미래학회의 창설에도 한 몫을 했다.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일본SF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여러 분야에서 수많은 활동을 하다 여든이 된 2011년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소설뿐만 아니라 만화, 시나리오, 논픽션, 평론 등 다양한 형식의 저작들을 많이 남겼다. 대표작 ‘일본침몰’을 비롯해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 ‘부활의 날’ 등이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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