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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알고 싶다] 남영동 대공분실, ‘효율적 고문’을 위한 최고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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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늦으면 기차 바퀴 소리가 들리고 기적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습니다. 이건 당시 본인에게는 큰 위안이었습니다. 바깥 세계를 그 기적 소리에서, 기차 바퀴 소리에서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절망적으로 고립된 나를 밖의 세계와 연결하는 끈이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용산역과 서울역을 연결하는 철길은 ‘그곳’ 옆을 지난다. 3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기차는 사람들의 몸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과 감정도 같이 실어 나른다. 하지만 ‘그곳’에 갇힌 청년 김근태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차 소리를 듣고 바깥 세계를 상상하는 것뿐. 청춘의 눈을 가리고 고통 속에 가뒀던 ‘그곳’. 기차 소리가 유일한 희망이 됐던 ‘그곳’은 바로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영화 ‘1987’의 주된 무대였던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아갔다.
악(惡)은 우연히 탄생하지 않았다
지하철 1호선 남영역이나 4호선 숙대입구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남영동 대공분실이 있다. 이곳은 특히 남영역에서 가까운데, 남영역의 유일한 출구에서 빠져나와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곧 검은색 벽돌 건물을 찾을 수 있다. 회사 건물과 모텔의 틈에 태연히 자리 잡고 있는 이곳에서 애먼 청춘들이 고문당했고 죽어갔다.
남영역에서 내려 가장 먼저 찾을 수 있는 대공분실의 흔적은 바로 울타리다. 사람 키를 훌쩍 넘기는 담벼락은 철조망을 이고 있다. 철조망 사이로 어두운 대공분실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 대공분실이 2005년 경찰청 인권센터로 간판을 고쳐 달면서 누구나 이 공간을 찾을 수 있게 됐지만, 독재 정권 시절 억울하게 가족이 붙잡혀 들어간 이들에게는 ‘통곡의 벽’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책과 영화로 접했던 많은 악행이 이 공간에서 자행됐다. 독재 정권의 악행이 우연히 저질러진 것이 아니듯, 이 공간 역시 우연히 탄생하지 않았다. 정권의 필요에 따라 계획되고 치밀하게 설계됐다. 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박정희 정권기인 1976년으로 당시 내무부 장관 김치열의 이름이 벽면에 자랑스레 새겨져 있다. 건물을 설계한 이는 한국의 대표적 건축가인 김수근. 최고의 권력과 최고의 건축 기술이 만나서 남영동 대공분실을 낳았다.
‘효율적’ 고문을 위한 구조
이 공간이 효율적인 고문과 철저한 보안 유지를 위해서 설계됐다는 흔적은 건물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취조실로 올라가는 길부터 심상치 않다. 취조실이 있는 5층으로 가려면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철제 나선 계단을 이용해야 하는데, 나선 계단은 1층과 5층만을 연결한다. 가파른 계단은 밟을 때마다 쿵쿵 울려대 공포감을 더하고, 계단참이 없어서 층수를 가늠할 수가 없다.
5층엔 16개의 취조실이 배치돼 있는데, 크기는 제각각이다. 김근태 전 의원이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게 고문당했던 515호는 다른 취조실 두 개를 합쳐놓은 듯한 크기다. 취조실의 구성은 비슷하다. 복도에 전등 스위치가 있어서 취조실 내부에서는 마음대로 불을 끄거나 켜지 못한다. 철문에는 건너편을 들여다볼 수 있게 렌즈 구멍이 있는데, 복도 밖에서 취조실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들었다. 각 출입문 위에는 검은 가림막 뒤에 놓인 카메라가 갇힌 사람을 감시한다.
취조실의 벽은 외부의 빛과 소리를 차단한다. 벽면에는 목재로 된 흡음판이 설치돼 옆 방의 대화를 엿듣기는 힘들지만, 고문으로 인한 비명은 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공포는 극대화되지만, 소통은 이뤄질 수 없는 공간인 셈이다. 또, 고문이 진행될 때 크게 라디오를 틀어놓았다고 한다. 김근태 전 의원은 “인간에게 파괴가 감행되는 이 밤중에 저 시적이고자 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취조실 내부에 난 창문은 폭이 한 뼘도 채 되지 않아 어둠을 몰아내기엔 역부족이며, 바깥 풍경을 바라보기도 쉽지 않다.
고문의 기억과 509호
1991년 치안본부가 경찰청으로 개편되면서 대공분실은 보안분실로 이름을 바꿔 달았고 조사실 내부 구조도 점차 변경됐다. 물고문이 행해지던 욕조도 뜯어냈다. 유일하게 보존된 곳이 박종철 열사가 살해된 509호다. 509호에는 조사관이 ‘탁’하고 쳤다는 책상과 박종철 열사가 누웠을 침대, 세면대, 변기가 있다. 박종철 열사가 사망 직전까지 물고문을 당했던 욕조는 방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데 가로 길이가 123㎝에 불과할 정도로 작다. 이 욕조를 두고 백형조 당시 치안본부 대공5차장은 “피의자가 피곤할 때 쉬고 목욕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발가벗긴 후 욕조에 머리를 집어넣는 것만이 물고문이 아니었다. ‘칠성대’라고 불린 목재 고문대 위에 피해자를 묶어 놓고 수건을 덮어서 그 위에 물을 뿌리기도 했다. 이를 김근태 전 의원은 “물리적 시간, 감각적 시간, 그것을 넘어서는 영원한 고통의 철저한 관철”이라고 회고했다. 이렇게 물고문을 진행한 후에 전기고문이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물고문뿐 아니라 구타나 전기 고문 등이 일상적으로 이뤄졌다. 구타의 수법도 잔인해 둔기로 천천히 손바닥을 때려 부어오르게 한 뒤 바늘로 글씨를 쓰거나, 각목을 허벅지에 끼우고 무릎을 꿇린 뒤 방망이로 허벅지를 치기도 했다. 고문을 당하지 않을 때는 침대에서 쉴 수 있었지만, 취침 시간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남민전 사건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았던 권영근씨는 이근안과 한 침대에서 머리를 반대로 하도 자기도 했으며 “새벽에 이근안이 몽둥이로 발바닥을 때리면서 저를 깨워 조사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남영동 대공분실. ‘그곳’엔 부끄러운 역사와 국가에 의한 살인의 흔적이 아직 남아있다. 시대는 변했지만 이곳을 관리하는 주체는 여전히 경찰. 이에 대해 “가해자인 경찰이 손을 떼고 국가인권위 또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운영하는 ‘인권기념관’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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