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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 8할은] "문래동 카이스트 만든 건 잡초 같던 내 집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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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고 있는 역할을 주세요. 나는 (인물을) 디자인하는 사람입니다." '응답하라' 시리즈로 유명한 신원호 PD는 tvN 수목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감빵생활’) 대본을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무려 다섯 번이나 만나 사전미팅을 했으니 뭐 하나는 맡겨야 했을 거다. 나도 큰 소리는 쳤지만 내심 걱정이 됐다. 어떤 캐릭터가 주어질지 몰랐으니까. "그럼 선배님, 이 역할을 디자인해 주세요." 결심을 굳힌 듯 신 PD는 내게 '문래동 카이스트' 역을 내밀었다. 혀 짧은 소리를 내는 문래동 카이스트를 디자인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혀를 움직이지 않거나, 힘을 줘가면서 대사를 연습했다. 발음까지 신경써야 하는 예민한 작업이었다. 그래야 시청자에게 제대로 대사를 전달할 수 있었다. 신 PD의 고민이 왜 그리 깊었는지 이해가 갔다.
내겐 금쪽같은 기회였다. 신 PD가 귀인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내 인생의 크나큰 은인이 됐지만… 특히 연극배우들이 대거 참여해 좋은 결과를 낸 작품이라 의미가 크다. 야구선수 김제혁을 연기한 박해수, 해롱이 역의 이규형 등은 연극계에서 친하게 지낸 후배들이다. 이규형은 2016년 2인 연극 '도둑맞은 책'에서 호흡을 맞춘 사이라 더 각별하다. '도둑맞은 책'은 유명 시나리오 작가 서동윤(박호산)과 그의 보조 작가 조영락(이규형)이 벌이는 심리 스릴러 연극이다. 당시만 해도 규형이가 해롱이 캐릭터로 스타가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워낙 연기를 잘하는 후배라 기회를 잘 살린 게 자랑스럽다.
이렇게까지 연극배우들을 뽑아 기회를 준 것에 보은하고 싶었다. 더 열심히 했다. 우리가 잘 못하면 신 PD 같은 연출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이런 연출자가 많아져야 무명배우들에게도 기회가 온다. 모범 사례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배우를 향한 끈질긴 구애작전
나 역시 오랫동안 단역을 전전하며 무명생활을 했다. 주ㆍ조연급으로 빛을 본 게 2000년대 들어서다. 1990년대 후반부터 충무로를 기웃거리며 '토요일 오후 2시'(1998),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1998), '유령'(1999) 등에 단역으로 얼굴을 비쳤다. '유령'을 촬영할 당시 만난 손병호 선배에게 "연극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조언을 구한 적이 있다. 손 선배는 "뭘 망설여. 그냥 부딪쳐!"라며 용기를 북돋아줬다.
대학로의 극단 연우무대를 무작정 찾아갔다. 중학교 때부터 팬이라며 "이 극단에 꼭 들어가야 합니다!"라고 떼(?)를 썼다. 정말 몇 달을 매일같이 들락거렸다. 간절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한이 풀릴 것 같았다. 보다 못한 한 선배가 나를 불러 세웠다. "맨날 찾아오면 미친 사람 같으니, 이틀에 한 번씩 오라"고 알려주더라. 정말 시킨 대로 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얼마나 환장할 일이겠는가. 안 된다고 하는데 계속 밀어붙인 거다. 역시 하늘은 무심하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극단 분들은 나를 받아줬다.
연극은 내게 동경의 무대였다.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얻어온 연극 '햄릿4'의 티켓 2장은 내 꿈의 원천이 됐다. 1980년대 극단 76이 공연하던 연극 '햄릿' 시리즈 중 '햄릿4'는 셰익스피어의 고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었다. 그때 무대를 떠올리면 지금도 콩닥콩닥 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다. 햄릿의 고뇌보다 인간의 삶이 주는 의미를 담은 연극이었다. 특히 조명 아래서 감정을 쏟아내던 배우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그때부터 나는 배우를 꿈꿨다.
서울 배재고에 입학하면서 내 나름대로 진로를 결정했다. 연기를 전공하고 싶은 마음에 친구들과 함께 교내에 없던 연극반을 만들었다. 이때 일명 '무데뽀' 정신이 길러졌나 보다. 학교의 인정을 받기 위해선 지도교사가 있어야 했다. 교무실로 향해 선생님들께 연극반 지도교사를 부탁했다. 그러나 모두들 거절하셨다. 학교에서 인정한 정식 동아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물러설 내가 아니었다. 친구 두 녀석과 함께 서울예전(현 서울예술대학) 연극과 사무실을 찾아갔다. 학과실에 모여 있던 형들에게 "우리 학교의 연극반 지도교사를 추천 받으러 왔다"며 허풍을 섞어 간청했다.
그 들 중 몇 명이 직접 우리 학교를 찾고는 기가 막혀 했다. 연극반 학생이라곤 달랑 5명이 전부였고, 변변한 교실도 없이 등나무 아래 모였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교습비를 제대로 받지 못할 것 같자 "여기서는 할 수 없으니 학과로 찾아와" 하곤 돌아갔다. 차마 학생들의 부탁을 차갑게 거절하기에는 우리의 간절한 모습이 눈에 밟혔나 보다. 그리고 우리가 포기할 줄 알았을 거다. 그 뒤 어떻게 됐느냐고? 예상했겠지만 내 성향이 어디 갈까. 친구들을 데리고 서울예전으로 형들을 만나러 갔다. 하지만 우리를 지도할 의무가 없으니 잘 가르쳐주지 않으려고 하더라. 그래도 쫓아다녔다. 결국 자신들이 연출하는 연극을 와서 보게 했다. 직접 연기를 전공하는 대학생들의 무대를 볼 수 있다니. 그 어떤 학원에서도 보지 못한 실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배우고 느꼈다. 돈 주고 살 수 없는 그때의 경험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김태웅ㆍ신원호
극단에 들어가 꿈만 같았지만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처음 받은 임금이 5,000원짜리 도서상품권 두 장이었다. 관객들의 요구에 대학로 연극계가 도서상품권을 현금 대신 받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렇게 받은 도서상품권은 고스란히 배우들의 임금으로 돌아왔다. 20대 초반에 결혼해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나로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지금도 연극배우들은 연극만으로는 생계를 꾸릴 수 없다. 아르바이트 등 생계수단을 따로 갖는 건 필수다. 나 역시도 고층건물 유리를 닦는 등 안 해 본 일이 없다. 하지만 그 어려움은 작품이 채워줬다. 좋은 작품을 만나 즐겁게 연기하는 게 힘겨운 일상의 버팀목이었다.
말은 이렇게 해도 진짜 힘들었던 시기다. 그러다 보니 악다구니만 남았다고 해야 할까. 내 성격은 점점 날이 서고 세져 갔다. 열악한 환경에 있었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 선배라도 상관없었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갈 정도로 감정 조절에 서툴렀다. 모난 성격 탓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반성하게 되더라. 마흔 살쯤 됐을 때는 '그 동안 잘못했던 분들에게 사과를 해볼까'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고민이 많았다. 그러다 하루는 꿈을 꾸었다.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나타나 "너는 이래서 문제야, 박호산!"이라며 혼을 내셨다. 사실 박호산은 내 친할아버지의 존함이다. 꿈에서 깬 나는 '왜 나를 박호산으로 불렀을까?'하는 의문을 갖게 됐다. 내 본명은 박정환이다. 그 때 깨달았다. 새로운 인격으로 바르게 살아보자고. 이름을 바꾸고 박호산으로 활동하게 된 계기다. 지금도 누군가가 "박호산!"하고 부르면 정신차리게 된다. 우스갯소리지만, 만약 박정환 시기에 신 PD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일단 다섯 번이나 만나지도 않았을 거다. 하하.
그래도 나의 거친 성격을 올곧게 봐주신 분도 있다. 영화 '왕의 남자'의 원작인 연극 '이(爾)'의 극본을 쓴 김태웅 선배다. 지난 2003년 그는 내게 공길 역을 제안하며 주인공을 맡겼다. 사실 그 전에 연극 '라이어' 등에서 주인공을 했지만 대중에게 크게 인식되지 않는 게 공연계다. 김 선배는 이런 나를 '연기 좀 하는 배우'로 알려준 감사한 분이다. 며칠 전에도 '감빵생활'을 얘기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연극계의 은인이 김 선배라면, 방송계에선 신 PD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분 모두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길을 제시했으니까. 신 PD는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선장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다. 예의 바른 그의 말씨와 행동은 인격적으로도 배울 게 많다. 미담 몇 가지를 소개하겠다. 캐스팅이 되고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어느 날 친구들과 볼링을 치고 있는데 신 PD에게 전화가 왔다. "안녕하셨어요? 내일부터 첫 촬영이 시작되는데요. 3회부터 나오시니까 그때까지 못 뵐 것 같아, 보고 싶어서 전화드렸어요." 정말 따뜻한 사람이다. 또 교도소 목욕탕 장면을 촬영할 때 춥다고 하자 "시청자들을 뜨겁게 품으면 춥지 않습니다"라며 말을 예쁘게 하더라.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즐겁게 연기할 수 있던 건 아마도 신 PD의 따뜻한 배려 덕분이 아니었을까.
<배우 박호산(47)과의 인터뷰를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정리=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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