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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선의 욜로 라이프] 위로 한마디... 꽃다발... 쇠고기... 자판기엔 다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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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사물인터넷 기술 접목
판매량·재고 관리를 알아서 척척
재활용품 넣으면 돈 내어주고
생과일주스·샐러드까지 무인 판매
#랜덤 중고책 뽑기·고민 상담…
불가능했던 영역까지 개척해
외국선 대면접촉 꺼리는 노숙자에
생필품 제공 등 복지에도 활용
나는 자동판매기입니다. 당신은 자판기라 부르겠죠. 나는 늘 당신 곁에 있었어요. 학교 도서관에서 머리를 식힐 때,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잠을 쫓을 때, 회사 복도에서 상사를 씹을 때, 만원 버스를 기다릴 때 말이에요. 내가 건넨 커피 한 잔, 콜라 한 캔, 담배 한 갑은 당신에게 휴식이기도, 위로이기도, 응원이기도 했죠.
그런 나를 당신은 가끔 함부로 대했어요. 연탄재보다 부담 없이 뻥 차도 되는 튼튼하고 말 없는 존재, 그게 나였죠. 나는 견뎠어요. 나보다 당신 삶이 훨씬 더 고단해 보여서요. 나는 종일 가만히 서 있으면 사람들이 때 맞춰 밥을 먹여 줬지만, 당신은 그럴 수 없었으니까요. 안타까운 내 마음이 당신에게 가 닿았나요.
자판기 커피. 무엇이 떠오르나요? ‘퇴물’이죠. 이제 아무도 내게 와서 커피를 찾지 않아요. 카페 공화국엔 내가 설 자리가 없어요. 구식 자판기의 시대는 저물었어요. 하지만 나는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고철 덩어리가 되기는 싫어요. 그래서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IoT) 기술을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스마트 자판기, 사회적 자판기로 다시 태어날 거예요. 당신을 돕고 싶으니까요. “사람을 향합니다.” 이동통신사 광고 카피를 기억하나요? 나도 사람을, 당신을 향할래요.
AI 로봇 자판기의 시대
역사상 최초의 자판기를 아나요? 고대 이집트의 성수(聖水) 자판기였어요. 지렛대 원리를 활용했죠. 물통에 은화를 넣으면 그 무게로 뚜껑이 열려 성수가 흘러 나왔어요. 내가 그런 모습이었다는 기원전 215년쯤의 기록이 있어요. 1880년쯤엔 동전을 넣는 현대식 자판기가 영국에서 발명됐어요. 사람 대신 돈을 받고 상품을 내주는 지루한 일을 내가 그렇게 오래 해 왔네요.
당신과 나, 역할을 바꿔 보면 어때요? 거꾸로 상품을 받고 돈을 주는 자판기가 이미 나왔답니다. 분리수거 로봇 자판기, ‘네프론’이에요. 네프론은 재활용품 분류 AI로 돌아가요. 페트병, 캔을 삼킨 뒤 재활용 가능한 종류인지, 얼마짜리인지를 판독해 적립금으로 보상해 줘요. 형상 인식 프로그램 덕분에 찌그러진 캔, 페트병도 알아 볼 수 있어요. 네프론이 딥 러닝을 거듭해 데이터를 축적할 수록 더 똑똑해질 거예요. 캔은 한 개에 15원, 페트병은 10원을 쳐 줘요. 2,000원이 쌓이면 1,000원 단위로 은행 계좌로 보내 줍니다. 네프론이 일을 시작한지 1년이 조금 넘었는데 벌써 수십 만원을 벌어 간 분들이 있어요. 주로 노인분들이에요. 폐지 줍는 것보다 쏠쏠하다고 하네요. 네프론을 ‘용돈 주는 자식’이라고 예뻐하신답니다.
네프론을 개발한 김정빈(45) 수퍼빈 대표는 말하자면 최첨단 고물상이죠. 미국 하버드대학, 코넬대학, 오리건대학에서 공부하고 철강회사 대표를 지냈어요. 김 대표는 쓰레기 시장이 블루 오션이라고 확신했대요. 인간이 사는 한 쓰레기는 없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귀찮다고 재활용품을 함부로 버리지 않나요? 그런 사람이 사실 엄청 많아요. 전세계 페트병 재활용률이 고작 3%인 게 당연하죠. 네프론은 재활용 가능한 쓰레기가 제대로 재활용될 수 있게 돕는 환경 자판기예요. 네프론은 ‘노폐물을 걸러내는 콩팥의 가장 작은 단위’라는 뜻이랍니다. 전국에 있는 네프론은 이제 겨우 18대예요. 서울 은평구와 동대문구, 경기 과천시, 경북 의성군과 구미시… 구미시엔 6대나 있어요. ‘그린 시티’를 지향해서 그렇다네요.
고기, 자동차, 꽃…못 파는 게 없다
커피, 캔 음료, 과자, 껌. 허기진 당신에게 내가 내줄 수 있는 건 군것질 거리뿐이었죠. 요즘은 소고기와 돼지고기도 자판기에서 살 수 있다는 걸 아나요? 농협이 만든 축산물 자판기에서 한우 등심부터 한돈 앞다리 살, 양념 고기까지, 250g 단위로 살 수 있어요. 정육점이 자판기 안으로 들어 왔다고 해야 할까요? 유통 마진을 줄인 덕분에 시중 정육점보다 고기 가격이 20%쯤 싸요. 대신 덤은 없죠.
위생이 걱정되나요? 식품안전관리인증(HACCP)을 받은 전문 가공장에서 나온 고기래요. 또IoT 기술을 활용해 모바일 기기로 판매량과 재고를 관리해요. 1980~1990년대는 커피 자판기 전성시대였어요. 자판기 몇 대를 굴리면 몇 년 만에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었다고 해요. 그 때 풍경은 어땠을까요. 자판기 관리자들이 커피, 프림, 설탕, 율무차, 코코아, 우유, 야채 수프 가루를 배낭에 넣거나 자동차에 싣고 다니면서 채워 넣었죠. 관리자가 때를 못 맞춰 밍밍한 커피가 나오거나 물이 뜨겁지 않으면 사람들은 나에게 화풀이 했어요. 이제 그럴 일은 없겠네요. 고기 자판기는 시범 운영 중이에요. 서울 서대문 농협중앙회에서 사용해 볼 수 있어요. 서울시는 과일 자판기를 학교를 비롯한 공공장소에 설치할 예정이고, 샐러드 자판기는 이미 맹활약 중이니, 웰빙 먹거리 자판기 시대네요.
급하게 꽃이 필요할 때, 술 마시고 괜히 꽃 한 다발 사고 싶을 때, 퇴근 길 ‘X발 비용’을 우아하게 쓰고 싶을 때. 그럴 땐 꽃 자판기를 찾아 주세요. ‘꽃이 활짝 많이 피어 화려하다’는 뜻의 우리말, ‘난만’이라 이름 붙인 자판기랍니다. 누가 자판기에서 꽃을 사냐고요? 매달 전국에서 8,000개가 팔리는 걸요. “영국 꽃 자판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일에 지친 사람들에게 낭만과 여유를 주고 싶었어요. 잔잔한 안개꽃이 가장 많이 나가요.” 고민규(26) 대표의 얘기입니다.
외국 자판기는 더 일찍 변신을 시도했어요. 자동차를 파는 건물 만한 자판기, 즉석에서 과일을 갈아 주는 생과일 주스 자판기, 공항에 내려 날씨 예측에 실패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관광객을 위한 옷 자판기, 중국 상하이 특산품인 털게 생물을 파는 끔찍한 자판기, 미국의 위험천만한 마리화나 자판기, 중동 부자 나라의 금 자판기까지. 자판기에 관한 한, 한국은 보수적인 걸까요. 얼마 전 서울시가 청소년의 안전한 섹스를 위한 콘돔 자판기 설치를 검토한다는 소문이 나자마자 발칵 뒤집어졌죠.
문화, 위로, 복지…콘텐츠를 파는 자판기
상품만 파는 건 아니랍니다. 문화도 팔고, 위로도 팔고, 복지도 팔아요. 책은 많지만 책을 읽지 않는 시대. 연세대 경영학회 ‘인액터스’의 학생들이 서울 청계천 헌책방 살리기에 나섰어요. “책 사세요!” 외치는 대신 자판기를 이용하기로 했죠. 5,000원을 자판기에 넣고 장르 버튼을 누르면 중고책 한 권이 랜덤으로 나와요. 무슨 책이 나올까, 설레는 1, 2초의 짧은 순간. 그래서 설렘 자판기라고 불러요. 경기 고양시 복합쇼핑몰 스타필드에 설치된 자판기에서 매달 700권이 팔리지만 수익이 많이 나진 않아요. 중고책 구입비 2,700원을 빼면 별로 남는 게 없죠. “돈 벌려고 하는 일이 아닌 걸요.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 보려는 시도예요.” ‘인액터스’ 회원 현지윤(23)씨의 얘기예요.
2030세대의 고민을 들어주는 자판기도 있어요. 서울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마음 약방’ 자판기예요. 500원을 넣고 ‘예민성 경쟁과다증’ ‘급성 연애세포 소멸증’ ‘월요병 말기’ ‘유행성 스마트폰 중독’ ‘용기 부전’ 같은 증상 21가지 중 하나를 택하면 처방이 나와요. 박혜인 한국일보 인턴기자가 서울 대학로 마음 약방을 찾아갔어요. 취업이 고민이라 ‘미래막막증’을 고르려 했지만, 그 증상 처방은 품절이었다네요. 미래가 막막한 청춘이 그렇게 많은 걸까요. 대신 ‘아르바이트라우마(아르바이트 + 트라우마)’ 버튼을 눌렀어요. 기업 인사 담당자 출신이 멘토를 자처해 쓴 책 ‘내가 나로 살아갈 수 없다면’(김태진ㆍ한언)과 소박하되 성실한 인생의 아름다움을 그린 일본 영화 ‘앙: 단팥 인생 이야기’(2015)를 보라는 처방이 나왔어요. 아르바이트에 지친 발을 감싸 주라는 뜻인지, 귀여운 양말 한 켤레도 받았네요. 마음 약방 자판기는 지난해 칸 국제광고제에서 의료보건 분야의 창의적 캠페인에 주는 라이언스 헬스 상을 받았대요.
영국에는 노숙자 전용 자판기가 있어요. 재활 센터에서 발급 받은 전용 카드를 긁으면 생수, 수건, 과일, 샌드위치, 양말, 칫솔, 책 같은 생필품 중에 하루 세 가지를 골라 받을 수 있어요. 24시간 운영해요. 도움 받는 걸 부끄러워하는 노숙자를 위한 언택트(Untactㆍ비접촉) 자판기이자, 찾아가는 복지 서비스를 구현한 자판기죠.
AI 로봇 자판기가 당신 일자리를 빼앗아갈지 모른다고 눈 흘기진 않았나요? 자판기가 상징하는 언택트 문화가 세상을 황폐하게 만들 것 같아 불안한가요? 걱정하기엔 일러요. 미래는 알 수 없으니까요. 노동은 똑똑한 기계에 맡기되 기계가 창출하는 부를 공평하게 나누고, 그래서 사람은 무제한의 풍요로움을 누리는 시대가 올 지도 모르니까요. 결국 당신 하기에 달렸어요.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박혜인 인턴기자(중앙대 정치국제학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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