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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는 순간… ‘나쁜 분노’가 몰려온다

입력
2018.01.16 04:40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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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시체 장사” 등 부지기수

냉소주의 심화땐 나쁜 분노 고착화

블랙리스트 등 국가권력 ‘위협’이

좋은 분노 표출 막는 최대의 적

‘최순실 게이트' 진상규명과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집회가 열린 2016년 11월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청와대 앞 율곡로를 행진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최순실 게이트' 진상규명과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집회가 열린 2016년 11월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청와대 앞 율곡로를 행진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분노해야 할 시민이 침묵하는 순간 ‘나쁜 분노’가 사회를 뒤덮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이견이 적다. 극단적인 예로 청년실업 문제를 2030세대의 몫으로만 외면했던 독일 사회는 1933년 1월 총선에서 청년 표심을 자극하며 득표에 성공한 아돌프 히틀러에게 총리 자리를 헌납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을 가져왔다.

사회학자들은 공동체 의식과 연대감이 실종되면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경고한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을 향해 일부이긴 하지만 ‘시체 장사를 하는 거지’라고 폭언을 퍼부었던 때가 머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촛불정부 탄생에도 좋은 분노를 가로막는 적들

‘촛불 정신’으로 문재인 정부가 탄생했지만, 시민들이 사회 변화의 자양분이 되어줄 ‘착한 분노’를 정상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환경이 됐다고 말하긴 아직 이르다. 특히 국가 권력이 대중의 언로(言路)를 가로 막기 위해 조성하는 ‘위협 효과’에 대한 기억은 좋은 분노의 표출을 가로 막는 최대 적이다. 최진봉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국민들의 분노가 응집돼 사회적으로 폭발하기까지는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한다”며 좋은 분노를 가로막은 대표적 장애물로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트라우마를 꼽았다. 국가 기관이 여론 통제 목적으로 남용한 일반 국민 상대의 고소ㆍ고발도 여전히 시민사회에는 불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최 교수는 “광우병 위험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MBC PD수첩 피디들이 해직되고 고소ㆍ고발 당했다”며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방송인 김미화씨까지 블랙리스트 문제로 곤욕을 치르는 마당에 누가 나서려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뒤늦게 복권이 된다 하더라도 권력의 일상적 위협 아래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상황에서 공동체 의식이나 연대감을 발휘하라고 채근하기란 쉽지 않다는 뜻이다.

정치적 희망 상실한 세대의 냉소 비트코인에 빠지기도

2030세대가 최근 가상통화 비트코인 투기 열풍의 주역으로 꼽히는 것도 좋은 분노의 출구가 막힌 탓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여성 혐오 사건이 잇따르고, 국내서도 인종문제가 터져 나오는 것 또한 떼놓고 생각하기 힘들다는 평가도 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앞날의 목표보다 내 ‘밥 그릇’을 빼앗아갈 상대가 더 분명해 보이는 탓이라는 분석이다.

이렇게 냉소주의와 경쟁 지상주의에 사회가 매몰되면 ‘나쁜 분노’가 뿌리 내릴 공간은 커진다. 정당한 분노에 참여하지 않고 작은 실천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현실의 부조리와 문제의 원인을 국가ㆍ사회 시스템이 아니라 상대 진영에 속한 낯선 타자에서 찾게 되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국정농단 사태로 드러난 우리 사회 민주주의 위기의 책임을 박근혜 정부에서 찾지 않고, 오히려 정당한 문제제기를 한 ‘촛불 시민’에게 묻는 일명 ‘태극기 부대’의 시대착오적 현실진단도 비슷한 기제로 해석할 수 있다.

이택광 경희대 외국어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특히 나쁜 분노가 포퓰리즘이나 파시즘적 성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한다. 이 교수는 “기본소득제 등 분노한 세대가 바랐던 정책이 잇따라 좌절되는 상황”이라며 “세대의 좌절을 떨쳐낼 근본적 해결책이 나오지 않으면 냉소와 혐오를 피하긴 힘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동현 기자 na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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