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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대한민국… 새해엔 화 좀 줄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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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쇼핑카트 스쳐도, 쳐다보기만 해도
시비 걸며 폭언ㆍ몸싸움에 신고까지
성인 절반은 ‘분노조절 장애’ 통계도
#2
버스 문 안 열어 줬다고 ‘욱’
회식 자리서 고기 태웠다고 ‘욱’
#3
영업매장 등 서비스업 근무자들
스스로 ‘분노받이’라 부르며 한탄
“불공평해” 좌절감에 생활형 분노
“목소리 크면 이긴다” 방식도 만연
2017년 10월 추석을 앞두고 쇼핑객들로 매우 혼잡했던 서울 영등포구 한 대형마트 계산대 앞. 백발이 성성한 60대 남성과 그보단 젊어 보이는 50대 남성 사이에서 온갖 욕설을 동반한 고성과 삿대질이 오갔다. 60대 남성의 쇼핑카트가 앞서 가던 50대 남성의 등허리에 살짝 부딪히자 그가 ‘아이, X’라고 중얼거렸다는 이유에서다. 욕설을 들은 60대 남성은 격분해 “나이도 어린 XX가 죽고싶냐”며 때리려는 시늉까지 했다. 자신을 말리는 직원에게도 “새파랗게 어린 X이 저러는데 왜 나한테 XX이냐”고 폭언을 이어갔다. 계속되는 소란에 주변의 시선이 모아지자 이 남성은 눈이 마주치는 이들에게도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마트를 나설 때까지 화를 억누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쉽게 욱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인 ‘성난 사회’에 살고 있다. 매일같이 살을 부대끼면서 살아가는 가족에게, 직장동료에게, 친구에게, 또 길거리나 대형마트 등 대중적인 장소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아주 사소한 이유로도 화를 낸다. 휴대폰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도, 찾는 물건이 없어도, 자신과 정치색이 다른 뉴스나 인터넷 글을 봐도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제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 조그만 것들에 분개하는, 참을성 없고 충동적인 사회가 2018년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의 2015년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의 절반 이상(52%)이 분노조절이 제대로 안 되는 상태라고 한다. 치료가 필요한 정도의 충동조절 장애 고(高)위험군(11%)도 10명 중 1명이 넘는다. 도대체 그들은, 아니 우리는 왜, 무엇에 화를 내고 있는 걸까. 2017년 연말 한국일보 기자들이 주변에서 접한 ‘화난 대한민국’의 풍경은 살을 에는 추위만큼이나 거칠고 사나웠다.
대중교통에서
지난달 13일 경기 고양의 한 마을버스가 두 승객의 싸움 탓에 지구대 앞에 멈춰 섰다. “조용히 좀 해달라”는 주변의 요청에도 아랑곳 않고 목소리를 높여 통화하던 30대 초반 여성이 자신을 못마땅한 눈길로 쳐다보는 30대 후반 남성에게 “뭘 보냐”고 쏘아붙이면서 싸움은 시작됐다. 그렇게 20분 넘게 두 사람은 욕설을 주고 받았다. 서로 어깨를 밀치는 몸싸움으로까지 이어지자 여성은 “경찰을 불러달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결국 운전기사는 근처 지구대로 차를 몰고 간 것이다. 경찰이 나왔지만 그는 다시 출발하려는 버스 앞에 뛰어들어 “이대론 억울해서 못 간다”고 가로막으며 난동을 피웠다. 출동한 지구대 경위는 “적어도 하루에 한 명은 이런 작은 시비로 지구대를 찾아온다”고 전했다.
“추워죽겠는데, XX. 경찰에 신고할 거야.” 11월 하순 서울 마포역 정류장에서는 50대 남성 승객이 버스 앞문 계단에 한 발을 올린 채 버스기사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버스를 기다렸는데 문을 안 열어줬다는 이유였다. 운전기사는 “못 봤다,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를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교통신호가 바뀌었음에도 이 남성이 계속 출발을 막고 서 있자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 일부가 “탈 거면 타고 아니면 내리라”고 짜증을 냈고, 그제서야 상황은 종료됐다.
버스나 지하철 등 사람이 많은 대중교통에서 이런 ‘폭발성 분노’로 인한 시비는 비일비재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겁난다는 한탄까지 나온다. 의정부 집에서 1호선 지하철로 서울로 등하교를 하는 대학생 윤서원(22)씨는 “자리 양보를 안 했다고 욕을 하는 할아버지도 있고, 짧은 치마를 입었다고 지팡이로 맞기도 했다”면서 “그래서 지하철을 탈 땐 눈치를 보다가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눈을 피하거나 아예 다른 칸으로 이동해 버린다”고 했다.
서비스매장에서
최근 서울 강남 한 유기농 식료품점에서는 주차비 1,000원 때문에 매장이 발칵 뒤집어졌다. 50대 남성이 매장 앞 주차장은 주차비가 없지만, 지하 주차장은 주차비 1,000원을 내야 한다는 안내를 듣고는 “왜 미리 말을 하지 않았냐”면서 불같이 화를 낸 것이다. 이 남성은 직원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도 모자라 매장 앞에 주차된 차량의 번호를 부르면서 차 주인을 찾았다. 한 40대 여성이 주인이라고 나서자 “당신 때문에 내가 매장 앞에 주차를 못했다”고 분풀이를 하더니 말리는 손님들에게도 “예의가 없다”면서 파와 두부를 던지며 분을 참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남성은 거듭된 직원의 사과를 받고 매장을 나서면서도 끝까지 “인생 똑바로 살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런 영업매장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스스로를 ‘분노받이’라고 부른다. 비슷한 무렵, 인천의 한 편의점에서는 “비닐봉투 값을 달라고 했다”는 이유로 손님이 물건을 집어 던지며 폭력을 휘둘렀다. 아르바이트생 윤모(23)씨는 “소주 2병을 산 손님에게 봉투값 20원을 달라고 하니 소주병을 바닥으로 던져 산산조각 냈다”면서 “평소에도 봉투값으로 화를 내거나 예민하게 반응하는 손님들이 종종 있어 봉투값을 달라고 하기 전에는 늘 긴장한다”고 털어놨다.
도난 방지용 태그로 인한 경보음이 울려도 매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두렵다. 경보음이 울린 이상 고객을 그냥 내보낼 순 없지만, 그렇다고 가방을 뒤지는 경우엔 열이면 아홉 화를 낸다고 한다. 서울 영등포구 화장품 매장에서 일하는 김모(25)씨는 경보음 때문에 고객 앞에서 무릎까지 꿇어야 했다. “경보가 울려 죄송하지만 가방을 확인할 수 있느냐”는 말에 고객은 다짜고짜 그 자리에서 가방 내용물을 바닥에 쏟았다. “내가 물건을 훔치지 않았다면 무릎을 꿇고 사과하라”고 했다. 경보음이 울린 건 이 고객이 온라인에서 구입해 태그가 그대로 붙어있는 책 때문이었다.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했지만, 그는 분노가 풀리지 않은 듯 무릎 꿇기를 강요했다.
직장과 술자리에서
잠 자는 시간 빼고는 하루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 역시 분노가 폭발하는 공간이다. 서울의 한 수출업체 직원 정모(33)씨는 최근 납품 일정 문제로 생산업체와 통화를 하다 갑자기 큰 소리로 욕설을 하며 사무실 문을 발로 차고 뛰쳐나갔다. 선배 윤모(36)씨가 정씨를 휴게실로 데리고 가 “회사 임원들도 같은 사무실에 있는데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달라”고 다독이자 오히려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며 주먹을 불끈 올려 쥐는 모습을 보였다. 수원의 한 치과원장은 연말 회식을 고깃집에서 하던 중에 새로 들어온 치위생사가 “고기를 제대로 못 굽는다”며 상을 뒤엎었다. 회식이 시작 된지 얼마 되지 않아, 각자 소주 한 두잔 정도만 마셨을 뿐 거나하게 술에 취한 상태도 아니었다. 당시 같은 자리에 있던 다른 치위생사는 “평소부터 그 직원의 손 끝이 야무지지 못하다고 못마땅해 하면서 쌓여있던 감정이 있었는데, 고기가 탔다는 핑계 삼아 화를 터트린 것 같다”면서 “화를 자주 내는 편이라 이전에도 직원들을 혼내다가 분에 못 이겨 벽을 발로 차 발가락 뼈가 부러진 적도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욱’하는 생활형 분노의 배경에는 개인의 성향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요인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참을성 부족이나 지기 싫어하는 기질적 특성에 더해 사회적인 좌절감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분노 촉발의 주요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분노사회 진단 보고서’를 작성한 최석현 경기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은 “더 나은 삶에 대한 욕구를 사회적 불평등 등의 장애물로 갈수록 성취하기 어려워지는 구조적 문제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당장의 이익을 성취하기 위해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해결방식이 자리잡은 탓에 공공기관이나 백화점, 음식점 등에서 분노를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불만을 표시하게 됐다는 것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역시 “우리 사회의 분노 심리에는 ‘불공평하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면서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정서가 크다 보니 불평등 의식이 증폭돼 남들에게 화를 표출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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