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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칼럼]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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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씬 얻어맞을 각오로 링에 올라
가상현실 같은 시간을 견뎌 내고
연말에 불행 없었다고 말할 올해
종이 울리고 또 한 해가 시작되었다. 2018년이라는 숫자가 적힌 빤쓰를 입고 다시 인생이라는 사각의 링에 올라야 한다. 셰도우 복싱을 시작하는 머리 위로 스포트라이트처럼 하얀 눈이 쏟아진다. 만화 ‘허니와 클로버’의 주인공은 말했다. “내리는 눈을 올려다보고 있자면, 모래시계 바닥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속절없이 쏟아지는 시간의 눈을 맞으며, 부랴부랴 새해의 계획이라도 세우고 싶어진다.
그러나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목표나 계획 같은 건 없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권투 선수 중 한 사람이었던 마크 타이슨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대개 그럴싸한 기대를 가지고 한 해를 시작하지만, 곧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지는지 곧 깨닫게 된다. 링에 오를 때는 맞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 같은 건 없다.
행복의 계획은 실로 얼마나 인간에게 큰 불행을 가져다 주는가. 우리가 행복이라는 말을 통해 의미하는 것은 대개 잠시의 쾌감에 가까운 것. 행복이란, 온천물에 들어간 후 10초 같은 것. 그러한 느낌은 오래 지속될 수 없기에, 새해의 계획으로는 적절치 않다.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을 바라다보면, 그 덧없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쉽게 불행해진다. 따라서 나는 차라리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 이를테면 왜 만화 연재가 늦어지는 거지, 왜 디저트가 맛이 없는 거지, 라고 근심하기를 바란다. 내가 이런 근심을 누린다는 것은, 이 근심을 압도할 큰 근심이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이 작은 근심들을 통해서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세이쇼 나곤(清少納言)은 “겨울은 이른 아침이 좋다. 눈이 내리고 있으면, 그 아름다움이야 이루 말할 나위도 없다. 서리가 새하얗고, 또 그렇지 않더라도 매우 추운 때에, 불을 급히 피워 숯불을 들고 복도를 지나는 것도 계절에 꼭 어울린다”고 말했다. 나는 ‘마쿠라노소시’(枕草子)의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세이쇼 나곤이 느끼는 눈과 숯불의 아름다움보다는, 그 느낌을 가능하게 하는 세이쇼 나곤의 위치를 생각한다. 그는 밤새 떨지 않고 분명 따뜻한 전기장판 속에, 아니 이불 속에서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아침을 맞았겠지.
하지만 애당초 새해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죠? 해가 바뀐다고 우리가 흥분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검은 옷에 금속 목걸이를 하고 다니던, 그러나 지금은 연락이 끊긴, S양은 이렇게 반문한 적이 있다. 어디선가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새해라는 건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고. 과학소설에 나오듯이, 통 속에 든 뇌에다가 어떤 미친 과학자가 새해라는 이름의 자극을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 미친 과학자가 바로 우리 자신일 수도 있다고. 그런 가상현실을 통해서라도 우리 삶에 리듬감을 주는 것이 영장류가 발명한 삶의 지혜일 수 있다고.
1분이 60초라는 것도, 1시간이 60분이라는 것도,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것도, 12달이 지나면 한 해가 저문다는 것도, 그리하여 마침내 새로운 해를 맞는다는 의식도 모두 인간이 삶을 견디기 위해 창안해낸 가상현실이다. 인간은 그 가상현실 속에서, 그렇지 않았으면 누릴 수 없었던 질서와 생존의 에너지를 얻는다. 그리하여 나는, 2018년이라는 평행우주에서 야구선수로 살고 있는 또 다른 나를 생각하겠다. 새해에 쏟아져 내리는 눈송이들은, 모래시계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시간의 입자가 아니라, 살고 싶었으나 끝내 살지 못했던 삶을 대신 살아주는 또 다른 내가 때려 낸 홈런들이라고 생각하겠다. 평행 우주의 펜스를 넘어 온 장외 홈런들이라고 생각하겠다. 이것이 내가 올 한 해를 계획하는 방식이니, 시간이여 또 한 해치를 쏟아 부어라. 그리고 2018년 연말의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 올 한 해가 불행하지 않았다고.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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