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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도] 판사는 달라야 한다

입력
2017.12.2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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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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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서울중앙지검 출입기자 시절 검찰 수사관에게 뇌물을 건넸다는 여성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돈을 주게 된 경위와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말해줬다.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물어봐도 비슷한 대답이 돌아오는 걸 보니, 돈을 건넨 게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검찰도 여성 진술을 토대로 수사관 2명을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했다. 여성은 당시 검사로부터 “당신도 뇌물공여 혐의로 재판에 넘길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지만, 그는 고민 끝에 형사처벌을 감수하고 자백했다.

하지만 여성의 용기 있는 결정에도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진술의 일관성이 떨어진다며 돈을 받았다는 수사관들과 돈을 줬다는 여성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판사도 이런 결과가 좀 어색했는지 이런 말을 남겼다. “범행을 자백했는데도 무죄를 선고 받는 이상한 결과가 될 수 있지만, 형사소송법의 증거원칙에 따라 어쩔 수 없다. 자백의 진실성에 의심이 있고 보강증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

선고 소식을 접한 뒤 법관의 판단에 문제를 제기하고 법원도 비판하고 싶었지만, 오래 전 언론계 선배가 해준 말이 떠올라 그러지 않았다. 기자생활 4년째 되던 2005년, 법조 출입기자로 서초동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그 선배가 들려준 이야기다. 검찰 조직과 수사상황은 다양한 각도에서 취재해 얼마든지 비판해도 되지만, 법원 선고와 법관에 대한 비판은 가급적 삼가라는 것이었다. 사법부 판단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씹어대기’ 시작하면 사회가 너무 혼탁해지니, 웬만하면 법원 판단을 존중하고 판결내용만 담담하게 전하라는 의미였다.

지금은 법원을 향한 언론의 시각이 그렇게까지 경직된 것은 아니지만, 법원은 여전히 언론이 관대하게 바라보는 대표적 기관으로 남아있다. 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되면 대체로 무리한 기소를 했다고 검찰을 비판할지언정, 봐주기 판결했다고 법원을 욕하지는 않는다. 피고인에게 중형을 선고하면 죄인을 질타했다고 평가하지, 과도한 판결이라고 비꼬지도 않는다.

그러나 법원 판단을 존중한다는 것이 법원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뜻은 아니다. 이는 형사재판에서 판사가 무죄를 선고하며 자주 읽어 내려가는 문구만 봐도 알 수 있다. “범죄사실이 인정되려면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엄격한 증거에 의해야 한다.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론 합리적 의심 없이 공소사실이 충분히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 검찰이 제기한 범죄 혐의에는 수긍이 가지만, 판사가 보기에 의심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피고인 이익을 위해 무죄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같은 형사사법의 대원칙에 따른 유ㆍ무죄 판단이 실체적 진실과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1ㆍ2심 법원의 판단이 다르고, 재심을 통해 유ㆍ무죄가 뒤집히는 경우만 봐도 법원 판단이 절대선이 아님은 자명하다.

사법부 판단에도 이처럼 트집 잡을 구석이 많은데도, 법원을 비판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데 주저하는 이유는 사법부가 잘해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혐오와 반목이 판치는 시대에 사법부마저 조롱의 대상이 된다면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다는 심리적 마지노선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매너리즘과 일탈로 여러 차례 무너져 내릴뻔한 법원을 떠받친 것도 바로 다수의 국민들이다. 판결을 인정해달라고 법관을 존중해달라고 강요당하고 있는데도 군소리 없이 침묵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판사들은 높은 수준의 기대에 걸 맞는 직업의식과 사명감을 갖고 있을까. 법조기자로서 ‘청렴하고 강직한 판사’를 교과서에서만 본 것 같으니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다.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가 설파한 “법관은 정의의 상징으로서 완전무결해야 한다”는 기대에는 못 미치더라도, 이 땅의 판사들은 왜 기를 쓰고 법복을 입으려고 했는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판사는 모든 면에서 달라야 한다. 그래야 흠이 있어도 흠이 안 잡힌다.

강철원 사회부 기자 str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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