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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작 불패는 옛말… 중소영화 ‘흥행 역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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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때 관심 밖이던 ‘범죄도시’
50일 넘게 상영하며 682만명 돌파
‘청년경찰’은 손익분기점 3배 육박
‘군함도’ ‘남한산성’ 부진과 대조
‘판에 박힌’ 대작에 실망한 관객
소소한 드라마ㆍ오락거리로 몰려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고 했던가. 무관심이 그만큼 무섭다는 의미일 터. 그러나 올해 극장가에선 이 속설이 무색해지는 역전극이 여러 번 펼쳐졌다. 인지도가 거의 없다시피 해 무관심 속에 출발한 중소 규모 영화들이 깜짝 흥행을 일구며 블록버스터 일색이던 박스오피스를 뒤흔들었다.
그 대표주자가 ‘범죄도시’다. 추석 연휴인 지난달 3일 개봉한 ‘범죄도시’는 계절이 바뀐 지금까지도 박스오피스 상위권에서 건재하다. 이러다 해를 넘길 기세다. 누적관객수는 20일까지 682만명에 이른다. 하지만 개봉 당시엔 ‘킹스맨: 골든 서클’과 ‘남한산성’에 밀려서 전혀 주목 받지 못했다. 별다른 화젯거리도 없어서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선 ‘무슨 배짱으로 추석 연휴를 노리느냐’며 의아해하는 반응마저 나왔다. 입소문 하나로 판도를 뒤집고 청소년관람불가 영화 중 역대 3위 성적표를 받아 든 ‘범죄도시’의 흥행은 올해 영화계 최대 이변으로 꼽히고 있다.
그에 앞서 여름 성수기에는 ‘청년경찰’이 반전의 주인공이었다. 신인감독 작품인 데다 티켓파워를 발휘하기엔 아직 경력이 부족한 박서준과 강하늘이 주연이라 메이저 배급사의 여름 ‘텐트폴’(천막 기둥처럼 흥행 시장을 지탱하는) 영화로는 중량감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던 영화다. 그러나 ‘청년경찰’은 260억원 대작 ‘군함도’와 150억원이 투입된 ‘택시운전사’ 사이에서 맹활약했다. 두 영화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제작비 70억원을 쓰고 손익분기점(200만명)의 3배 가까운 563만 관객을 동원했다.
홈런까지는 아니어도 뜻밖의 장타를 날린 타자들도 여럿 있다. 77세 나문희가 주인공인 ‘아이 캔 스피크’는 평단의 호평 속에 327만명을 불러모았고, ‘보안관’ ‘재심’ ‘박열’도 관객 200만명을 넘기며 선전했다. ‘보안관’은 제작비 75억원이 들었고, ‘재심’은 55억원, ‘박열’은 시대극임에도 불과 40억원으로 찍었다. 소위 ‘가성비’가 높았다.
이 영화들의 성과는 기대를 한 몸에 받던 대작 영화들의 부진과 비교돼 더 도드라진다. 1,000만 흥행을 당연시했던 ‘군함도’는 659만명에서 행진을 멈췄고, ‘남한산성’도 작품성에선 호평 받았으나 흥행에선 384만명으로 저조했다. 여름 시장을 노렸던 범죄 누아르 ‘브이아이피’는 기대를 한참 밑도는 137만명에서 시동이 꺼졌다. 황정민 송중기 소지섭(‘군함도’), 이병헌 김윤석 박해일 고수(‘남한산성’), 장동건 김명민 이종석(‘브이아이피’) 등 혼자서도 영화 한 편을 너끈히 책임질 만한 배우들을 대거 불러모은 멀티 캐스팅과 화려한 볼거리, 그에 따르는 막대한 제작비와 대대적인 홍보마케팅 등 물량 공세가 먹혀 들지 않았다. 극장가 주요 성수기에 점령군처럼 밀고 들어온 일부 대작 영화가 관객을 독식하던 현상도 다소 누그러졌다.
◆2017년 주요 한국 영화 흥행 성적
※20일 기준 영화진흥위원회 집계(총제작비는 마케팅비 포함)
‘대박 아니면 쪽박’으로 양극화된 한국 영화계에서 대작 영화의 부진과 중소 영화의 선전을 이례적인 일로 치부하기엔 사례도 많고 경향도 뚜렷하다. 영화 관계자들은 극장가 핵심 관객층인 20대의 성향 변화에서 이유를 찾는다. 판에 박힌 기존 영화와는 다른 영화에 대한 갈증이 반영됐다는 것이다. 김형호 영화시장 분석가는 “흥행 공식에 따라 안전하게 기획된 대작 영화에 대한 선호가 많이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며 “관객의 다변화된 요구에 맞춰 영화의 기획 개발 방향을 바꿔야 할 때가 됐다”고 진단했다. 한 영화 홍보사 대표도 “정보 접촉 창구가 많고 입소문 전파 속도가 빨라져 요즘 관객들은 영화의 외형적 요소에 쉽게 좌우되지 않는다”며 “대작 영화들이 개봉할 때마다 반복되는 스크린 독과점 논란 같은 불공정 경쟁에 대한 반감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말했다.
관객의 선택이 양분화되고 있다는 해석도 있다. 앞의 홍보사 대표는 “한국 대작 영화들이 물량을 쏟아 부어도 미국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비하면 저예산 수준이라 볼거리 면에선 뒤질 수밖에 없다”며 “영화적 볼거리는 마블의 히어로물 같은 할리우드 영화로 충족하고 한국 영화에선 드라마와 소소한 오락거리를 찾는 성향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고도 분석했다.
중급 영화들의 흥행이 장기적으로 한국 영화 지형도에 변화를 가져올 거라는 전망도 나온다. ‘범죄도시’를 제작한 홍필름의 김홍백 대표는 “고예산 영화에만 관심을 집중하던 투자사들이 앞으로는 중저예산 영화들도 적극적으로 검토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톱 배우 캐스팅이 갖춰져야만 투자가 이뤄지던 관행에서 벗어나 다양한 영화들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번 기회에 대작 영화들의 기획과 예산 설계 과정을 근본부터 점검해야 한다는 의견도 뒤따른다. ‘군함도’와 ‘남한산성’의 경우, 성과가 기대에 못 미쳤을 뿐 아예 ‘망했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다. 다만, 애초 1,000만명이 볼 만한 이야기가 아닌데도 높은 목표를 설정해 무리한 제작비를 쓰면서 ‘상대적 실패’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김형석 영화평론가는 “‘군함도’는 인간 관계가 이야기의 중심이고 ‘남한산성’도 정치 세력간의 다툼을 다루고 있는데 굳이 예산이 많이 드는 블록버스터로 만들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며 “대작은 사극 장르에, 그 외 상업영화는 온통 범죄물에 쏠려 있던 한국 영화계가 자본의 편향성을 극복하고 제작 과정의 합리성을 찾아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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