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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칼럼] 아이 캔 스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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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교수’는 아니었다는 증거들
비극적 상황에서도 유머 잊지 말길
저마다 소중한 자존의 삶 이어가야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여운이 길게 남을 줄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 기억들이 있다. 이를테면 오래 전 파리에서 읽은 이메일이 그렇다. 학회를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숙소에 돌아와 컴퓨터를 켜자, 조교가 보내 온 간결한 한 줄 메시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 오실 때 잊지 말고 선물 사오세요.” 이 말의 앞에도 뒤에도 다른 내용은 없었다. 조교는, 교수가 혹시 자기에게 줄 선물을 잊을까 봐, 오직 이 한 줄을 쓰기 위하여, 일부러 시간을 내어,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선물을 사갔던가? 어쨌거나 그 이메일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된 것은, 그 내용 자체 보다는 그 이후 대학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 무렵부터 언론에서 한층 자주 교수들의 대학원생 착취, 추행, 폭행 사건들을 보도했다. 해당 사례가 늘어난 것일까, 원래 있던 관행이었는데 단지 보도 횟수가 늘어난 것뿐일까. 어쨌거나 그러한 희비극이 계속되자, 스스로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혹시 쓰레기 교수인가. 쓰레기라면 타는 쓰레기인가, 타지 않는 쓰레기인가.
어쩌면 인간은 다 쓰레기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마주치는 개들에게 속삭인다, 네가 좋아하는 인간이라는 포유류는 사실 좀 그렇단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쓰레기일지는 몰라도 순수에 가까울 정도의 전폭적인 쓰레기는 아니기를 바란다. 최소한의 존엄에 대한 환상이 있어야 인간은 제정신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자신의 어느 한 조각만큼은 쓰레기가 아니라고 믿고 싶어 한다. 내 경우, 저 조교의 이메일은, 내가 저 순간 쓰레기가 아니었다는 물적 증거로 남았다. 학생에게 선물을 요구하는 교수가 아니라는 최소한의 자존의 증거가 거기에 있었다.
자존의 증거를 찾기 위한 평교수의 고요한 투쟁 속에서도, 학교에서는 또 다른 희비극이 계속되었다. 지루하고 공허한 구호를 내세운 총장 선거가 치러졌고, 노벨상 수상자를 유치하겠다는 선언이 나왔고, 올해는 랭킹 몇 위의 대학이 되었다는 홍보가 난무했다. 그 와중에서도 학생들은 간혹 연구실에 찾아와 우울증을 호소하며 눈물을 쏟는다. 그럴 때, 내가 해주는 말은 거의 정해져 있다. 반드시 전문가를 찾아가 상담해보라. 그리고 전문가가 약을 처방하면, 거부하지 말고 약을 먹을 필요가 있으며, 우울증 약을 먹는 일은 전혀 거리낄 일이 아니라고. 그날은 한 학생이 최근에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쏟았다. 이 세상에는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찾아가면 좋을 전문가는 없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날 학생을 잘 위로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도 대학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위로가 되기 어려운 이야기만 털어놓았다.
다시 며칠 고민한 끝에, 그 학생에게 영화 DVD 하나를 건넸다. 김현석 감독의 ‘스카우트’. 개봉 당시 크게 흥행하지는 못했던 이 영화는 광주민주항쟁에 관련된 영화들 중 최고작이다. 컨디션이 좋을 때의 김현석 감독은, 우리 삶은 거대한 어떤 흐름 위로 무력하게 스쳐 지나가는 거품 같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유머를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광주민주항쟁이라는 비극적 흐름 위로 스치는 어떤 회한, 속죄, 그리고 유머가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 속에서 ‘스카우트’를 건넸다. 그리고 그 DVD는 내가 그 때 쓰레기가 아니었다는 물적 증거로 남았다.
그 이후 이 두 학생은 어찌 되었나. 교수에게 선물을 사오라던 조교는 예상대로(?)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 대신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의 영혼을 담은 영화를 만들어보겠다고 호언하며 절세미인과 연애 중이다. 아버지를 여의였던 학생은 검사가 되었고, 얼마 전 약혼자를 자랑하러 모교에 다녀갔다. 여린 사람이 무서운(?) 검사 일을 한다는 것을 우려하자, 그 검사는 야무지게 나를 위로한 적이 있다. 제가 일할 때는 선생님 앞에서처럼 그러지 않아요.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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