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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습 직후 김정남 얼굴엔 액체, 눈은 충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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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관, 법정서 “김, 천천히 걸어달라” 말해
여성 피고인들 “우리도 속았다” 무죄 주장
김정은 북한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을 맹독성 신경작용제 VX로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여성 피고인들에 대한 재판이 본격 시작됐다. 사건 발생 7개월 반만으로, 말레이시아 검찰이 세팡 법원에서 기소한 지 꼭 7개월 만이다. 피고인들은 법정에서 “TV 리얼리티쇼 촬영을 위한 몰래 카메라라는 말에 속았다”며 억울함과 함께 무죄를 주장했다.
말레이시아 샤알람 고등법원은 김정남 살해 혐의로 기소된 인도네시아인 시티 아이샤(25)와 베트남 국적 도안 티 흐엉(29)에 대한 첫 공판을 가졌다. 이날 오전 8시 경찰 호송차로 법원에 도착한 아이샤는 검정색 옷을, 흐엉은 긴소매 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경찰이 이들을 압송하는 과정에서 둘 모두 검정색 방탄조끼를 착용한 모습이 관찰됐다.
두 사람은 지난 2월 13일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김정남의 얼굴에 화학무기인 VX를 발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현지 검찰은 이들을 지난 3월 1일 살인 혐의로 기소했지만, 사안의 민감성 때문에 상급법원으로의 이첩 절차를 밟으면서 이후 거의 7개월 지나도록 재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아이샤와 흐엉은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했다. 현지 검찰은 인도네시아어와 베트남어로 각각 두 사람에 대한 기소장을 낭독하며 이들이 김정남을 살해 의도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두 피고인은 유죄를 인정하느냐는 물음에 모두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샤와 흐엉은 지난 2월 체포된 이후 리얼리티 TV쇼 촬영을 위한 몰래 카메라라는 북한인 용의자들의 말에 속았다는 사실을 주장하며 억울함을 호소해 왔다.
이번 재판에서 첫 증인으로 경찰관이 법정에 출석했다. 공항에서 VX공격을 받은 김정남을 공항 내 진료소로 안내한 인물이다. 모흐드 줄카르나인 사누딘(31) 일경은 “통통한 남성이 안내센터 직원과 함께 와서 여성 두 명이 얼굴에 뭔가를 발랐다며 신고를 하고 싶다고 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또 “실제로 그의 얼굴에는 액체가 묻어 있었고 눈도 조금 충혈돼 있었다”고 당시 상황에 대해 말했다. 제3자가 당시 김정남 얼굴 상태에 대해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건 후 일본 후지TV가 범행 장면 일체가 담긴 폐쇄회로(CC)TV 화면을 확보해 보도했지만 이 같은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었다.
사누딘 일경은 또 김정남이 일단 치료부터 받고 싶어 해 공항 내 진료소로 데려갔다면서도 “진료소까지 가는 동안 천천히 걸어달라. 눈이 흐려져서 잘 볼 수가 없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사건이 일어난 항공사 키오스크(무인 체크인 기기)로부터 한 층 아래의 진료소까지 거리는 약 300m다. 특히 엘리베이터가 아닌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할 경우 100m 가량 더 길어져 VX공격을 당한 김정남이 걷기에는 짧지 않은 거리다. 김정남은 피습 후 약 20분 만에 사망했다.
아이샤의 변호를 맡은 구이 순 셍 변호사는 “아이샤는 김정남의 얼굴에 바른 물질이 독이란 걸 몰랐다. 그녀 역시 이번 사건의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아이샤는 올해 초 쿠알라룸푸르의 한 주점에서 북한 국적자 리지우(일명 제임스ㆍ30)에게 포섭돼 백화점과 호텔, 공항 등지에서 낯선 이의 얼굴에 로션과 매운 소스 등을 바르는 연습을 하다가 같은 달 말 캄보디아에서 ‘장’이란 인물을 만났다. 중국 TV 리얼리티쇼 제작자라고 소개한 ‘장’은 말레이 현지에서 몇 차례 더 예행연습을 시킨 뒤 2월 13일 오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김정남을 공격하라며 시티 아이샤의 손에 VX 신경작용제를 발라줬다고 구이 변호사는 밝혔다.
이후 조사에서 ‘장’은 북한 국적자인 홍송학(34)으로 드러났다. 국가정보원은 그를 북한 외무성 소속 요원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말레이 당국은 오종길(55), 리지현(33), 리재남(57) 등 다른 용의자들과 함께 범행 당일 출국, 북한으로 도주했다고 발표했다.
말레이 검찰은 이날 기소장에서 아이샤와 흐엉이 다른 용의자 4명과 함께 김정남을 살해할 공동 의사를 갖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지만, ‘용의자’의 신원은 적시하지 않았다. 말레이 경찰은 이들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인터폴(국제경찰)에 지원을 요청해놓고 있지만, 북한이 움직이지 않는 한 진척을 볼 수 없는 상황이다.
아이샤 포섭 역할을 맡았던 리지우 등 다른 북한 국적 용의자들은 치외법권인 주말레이 북한대사관에 숨어 지냈다. 하지만 말레이 당국이 북한 내 말레이시아인을 전원 억류해 인질로 삼은 북한의 ‘벼랑끝 전술’에 굴복, 출국을 허용하면서 현재 사건의 ‘몸통’은 모두 북한에 있다.
이와 관련, 아이샤와 흐엉의 모국인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에선 말레이가 북한 정권과 타협하는 바람에 여성 피고들만 희생양이 됐다며 반복해서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재판은 다음달 말까지 이어진다.
호찌민=정민승 특파원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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