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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칼럼] 호두주먹이라 불린 사나이

입력
2017.09.17 10:17

586세대 운동권 영화감독 지망생의 꿈

쿠데타 주역 단죄 영화 끝내 못 만들고

‘택시 운전사’ 천만 관객 흥행에 자조

586세대 영화감독 지망생 k는 학생운동에 매진했었다. 녹두거리에서 자취하던 그는 녹두장군 전봉준을 특히 존경했다. “녹두장군의 후배”를 자처하며 시위에 나아가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잘 씻지 않아 호두껍질처럼 거칠어진 손등 때문에, 친구들은 k를 호두장군, 혹은 호두주먹이라고 불렀다.

그러던 k도 80년대 사회변혁의 돌풍이 결국 6ㆍ29선언과 3당 합당으로 귀결되자 크게 낙담했다. 동지들은 현실과 타협하여 급기야는 국회의원이 되는 이들도 생겨났으나, 그는 녹두장군의 후배답게 변절하지 않았다. 그래, 예술의 세계에서라도 정의가 승리하는 순간을 만들고야 말겠어! “어무이, 돈 좀 주이소!”라고 졸라 마련한 돈으로 마침 개교한 영상원에 진학하고, 시네21을 정기 구독했다. 그토록 치열하게 영화판에 젊음을 불살랐건만, k는 끝내 장편영화 입봉에 실패하고 만다.

그의 자전적 시나리오 ‘호두주먹의 전설’은 협객 “호두”가 상경하여 그 매운 호두 주먹으로 쿠데타 주역의 이빨을 부러뜨린다는 내용이었다. 마치 권중희씨가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를 곤봉으로 단죄하듯이. 법이 지배층의 도구가 되어버린 사회에서는 법보다는 협객이 필요하다는 것이 k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영화판이 어디 만만하던가. 그의 시나리오는 번번이 펀딩에 실패했고, k는 녹두거리 자취방에서 심심풀이 과자나 씹으며 에로영화나 보는 고양이 집사 신세로 전락했다.

고양이의 냥냥 펀치를 받아주던 어느 날, k는 영화 ‘택시 운전사’가 크게 흥행했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어떻게 광주민주항쟁을 다룬 영화가 이 독점자본주의 사회에서 천만 관객을 동원할 수 있지? 그렇다면 왜 내 시나리오는 영화화되지 못했지? 궁금해진 k는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택시 운전사’를 보러 갔다. 과연. 영화는 너무 안전했다. 요즘 대학생들에게는 새로울지 몰라도, k에게는 익숙한 내용이었다. 특히 안이해 보였던 것은 영화의 결말이었다. 택시는 광화문으로 향하면서 광주 민주화운동의 흐름이 광화문 촛불시위로 이어졌다는 것을 암시했다. k는 부르짖듯 내뱉었다. “하! 아직 쿠데타 주역은 여전히 나보다 잘 먹고 잘살고 있는데!” 이처럼 미적지근한 영화가 변혁의 영화인양 하는 것이 k는 영 마뜩치 않았다. 꼬인 k의 심사에서 보자면, ‘택시 운전사’는 새 민주정권의 인기에 편승하여 흥행을 노리는 영화에 불과했다. 영화는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데, 쿠데타 주역은 여전히 잘 살고 있다는 현실이 부조리하게 느껴졌다. 자취방으로 돌아온 k는 오랫동안 간직해온 시나리오의 결말을 다음과 같이 수정했다.

비바람 몰아치던 어느 날이었다. 경호원들을 피해 늙은 쿠데타 주역과 일대일로 마주한 호두는 사자후를 토했다. “너희들은 정치의 출발이 비이성적인 혼돈이라고 주장하지. 허무와 무질서를 내쫓기 위해 탱크를 몰고 왔다고 주장하지. 쿠데타라는 폭력적 비상사태를 통해 허무를 의미로 바꾸고, 무질서를 질서로 바꾼다고 주장하지. 그 질서 덕분에 경제발전을 했다고 주장하지. 그러나 세상엔 자연법(natural law)이라는 게 있어. 인간이라면 따라야 할 평화의 법칙이 있는 거야.” k는 자신의 주먹에 새겨진 그.럼.에.도.불.구.하.고.라는 문신을 자랑스레 보여주었다. “폭력은 나빠. 난 그.럼.에.도.불.구.하.고. 숙고 끝에 주먹을 휘두르는 거야. 그걸 잊지 않기 위해 이 여덟 글자를 새겼지. 이 문신이 바랠까 봐 나는 오줌을 누고도 손을 씻지 않아. 내 폭력은 군부쿠데타와는 달리 숙고 끝에 나온 이성적이고 합리적 선택이야.” 늙은 퇴역 군인의 치열이 호두의 주먹쿠데타를 기다리는 것처럼 질서 있게 반짝였다. 호두장군은 마침내 너클(Knuckle Duster)을 주먹에 끼워 소중한 문신을 가리고, 구호를 외쳤다. 너무 오랜 숙고 때문이었을까. 그만 말이 새고 말았다. “나, 나는 녹두장군의 후배, 호두과자, 냥냥펀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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