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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살인마, 석면의 공습] “재개발 현장 1㎞ 떨어진 곳서 1년 살았는데 석면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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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베일 벗은 석면의 ‘살인기록’ 상>
본보 입수한 국내 첫 역학조사 살펴보니…
영업 끝난 새벽 백화점서 인테리어 공사 감독한 직원
새마을운동 때 초가 철거하고 슬레이트 지붕 설치 앞장 선 이장
확실한 사전 증상 없어 조기에 발견하기 어려워
“후속 조치 없이 손 놓은 정부 적극 조사로 추가 피해 막아야”
경남 통영에서 2002년 악성중피종 진단을 받은 여성 A씨는 44세가 되던 2009년, 부모님보다 먼저 세상을 등졌다. 주부였던 A씨가 어떻게 석면에 노출이 돼서 악성중피종에 걸리게 됐는지는 가족들조차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지난해 천안순천향대병원 석면환경보건센터(센터장 이용진 교수) 연구팀이 추적한 결과 A씨 어머니가 1980년대 초부터 5년간 선박 해체 업체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석면은 과거 선박 자재 원료로도 다량 사용됐다. 연구팀은 당시 10대였던 A씨가 집안 살림을 거들면서 석면 가루가 묻은 어머니의 작업복을 수년간 세탁했던 것이 석면을 접촉한 유일한 경로였다고 판단했다.
27일 본보가 입수한 연구팀의 역학조사 보고서는 참혹한 ‘현재형 피해’를 낳고 있는 석면의 위협을 상기시키는 경고문이었다.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등으로 구성된 연구팀 7명이 2015년 하반기부터 1년 반 동안 전국을 돌며 만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사정은 일일이 분류할 수 없을 만큼 다양했다.
35세였던 2013년 악성중피종 진단을 받은 B씨의 일터는 백화점이었다. 영업이 끝나고 난 새벽, 의류매장의 인테리어 공사를 감독하는 게 그의 일이었다. B씨는 복막에 악성중피종이 발병하면서 대장까지 절제를 했다. 새마을운동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슬레이트 지붕으로 인한 석면 노출 사례도 많았다. 본보로 직접 연락을 해 온 악성중피종 환자 홍모(52)씨는 청정지역으로 꼽히는 전남 구례 인근의 작은 마을이 고향이다. 메이크업 아티스트였던 홍씨가 투병생활을 하면서 겨우 찾아낸 기억은 중학교 때까지 살았던 집의 지붕이었다. 홍씨는 “지붕 보수를 하면서 슬레이트를 철거하려 했지만 부모님이 아깝다며 그 위에 기와만 얹어 계속 사용했던 게 생각난다”고 말했다. 연구팀이 조사한 사례 중에는 새마을 운동 당시 초가지붕 철거 작업에 앞장섰던 마을 전 이장도 있었다.
보고서에는 높은 사망률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사전 증상이 없어 조기 발견이 어려운 악성중피종의 ‘악명 높은’ 특징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조사 대상인 411명의 악성중피종 환자 가운데 진단 전 느꼈던 증상들은 감기, 몸살 등 다른 질병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가장 많이 느꼈던 증상은 일상 생활에서 숨이 차는 증상(83명ㆍ20.2%), 가슴 등의 통증(73명ㆍ17.8%), 기침(31명ㆍ7.5%), 소화불량(14명ㆍ3.4%) 등이었으며 나머지는 복합 증상이 나타나 병원을 찾았다고 밝혔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오빠의 작업복을 세탁하던 과정에서 석면에 노출된 것으로 조사된 D씨(사망 당시 40세)도 처음에는 악성중피종으로 인한 통증을 등 부위 근육통으로 잘못 알고 엉뚱한 치료를 먼저 받은 경우였다. 특히 411명 중 60명은 악성중피종 진단을 받기 전 결핵치료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심지어 사전 증상 없이 건강검진이나 다른 질환의 치료 과정에서 우연히 악성중피종이 발견된 환자도 74명으로 집계됐다. 이용진 센터장은 “상당수 환자들이 사전 증상 없이 극심한 통증을 느낀 후 뒤늦게 진단을 받거나 결핵 등 다른 질병으로 오인해 시간을 허비한 경험이 있었다”며 “석면 노출에서 진단까지 평균 수십년이 걸려 증상이 발현된 시점이면 환자가 고령이 돼 손 쓰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석면피해를 특정 지역이나 직군 등으로 한정할 수 없고 피해자 개인이 조기에 인식하기가 어려운 만큼 정부가 환자 발굴을 위해 적극 나서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연구팀의 보고서 역시 새롭게 발생한 피해자들에 대해 심층적인 조사를 할 수 있도록 새 설문지를 마련하고 역대 피해자들의 사례를 면밀히 분석해 예방 정책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환경부는 연구팀으로부터 최종 보고서를 제출 받은 지 7개월 가까이 지났지만 이렇다 할 후속 조치조차 없는 상황이다. 연구에 참여한 강동묵 전 양산부산대병원 석면환경보건센터장은 “환경부는 거액을 들여 만든 보고서를 적극 활용하기는커녕 추가 연구 착수에도 부정적인 태도로만 일관하고 있다”며 “위험군 예측 연구가 시급한데 공무원들은 ‘피해자들에게 돈만 나눠주면 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정부가 석면 광산ㆍ공장 인근 지역에 대한 조사 외에는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건설현장은 물론 석면과 무관한 사람들의 일상으로까지 피해가 확산되고 있는데도 환경부와 지자체는 광산이나 공장 이외 지역의 환자 발굴에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고 비판했다. 석면피해자들 역시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정부가 선제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해 10월 악성중피종 진단을 받은 아내를 둔 E씨는 “이대로 가면 계속 환자가 늘어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적극적인 조치를 안 하는 건 정부가 병을 키우는 것과 다를 게 없다”며 “잠재적 환자들이 하루 빨리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조원일 기자 callme11@hankookilbo.com
박세인 기자 sa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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