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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피디아] 작가도 연예인처럼… '팬덤 마케팅' 불황 출판계 점령

입력
2017.08.2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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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네이버 책문화판 생중계에 출연한 박준(오른쪽) 시인과 송종원 평론가가 시청자 질문에 답하고 있다. 평일 낮 방송인데도 1만명 이상이 시청했다. 네이버 화면 캡처
10일 네이버 책문화판 생중계에 출연한 박준(오른쪽) 시인과 송종원 평론가가 시청자 질문에 답하고 있다. 평일 낮 방송인데도 1만명 이상이 시청했다. 네이버 화면 캡처

“이런 질문 주셨네요. 주로 어디 출몰하세요?”

“수〮목〮금요일에는 합정이나 망원동 근처에 머물고요, 나머지 날에는 여행을 가지 않는 이상 경기 고양시 인근에 출몰합니다.”

10일 오후 2시. ‘시단(詩壇)의 아이돌’로 불리는 박준 시인과 문학평론가 송종원의 ‘만담’이 포털사이트 네이버로 생중계 됐다. 시인이 최근 펴낸 에세이와 근황을 소개하고, 생중계 코너에 올라온 독자 질문에 답을 하는 이들의 조용한 방송은 평일 낮 인터넷 방송임에도 1만3,900여명이 시청했다.

“노인은 눈물을 흘렸다/ 아이들은 살 수 있었다고/ 최고의 악동은 살아남는다고/ 지구 어딘가에서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이/ 반드시 만날 거라고…”

27일 오후 8시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시집 전문서점 위트앤시니컬에서는 심보선 시인의 시 낭독회가 열렸다. 심 시인의 새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에 수록된 시 5편씩을 낭독하고 5분 휴식을 갖는 이 낭독회의 참가비는 시집과 찻값을 포함해 2만원이지만, 공지 후 곧바로 매진됐다.

가장 정적인 문화예술로 꼽히는 문학계가 변하고 있다. 전시, 공연에 이어 출판계에도 생중계 바람이 불더니, 작가가 직접 자기 작품을 낭독하는 여러 행사들이 줄을 잇는다.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수식이 매년 붙고 있는 출판계에서 작가와 독자의 스킨십을 강화해 충성도를 높이는 ‘팬덤 마케팅’이 대세를 이루며 생긴 현상들이다.

황인찬 시인이 지난 3월 낭독회에서 시를 낭독하고 있다. 선착순 30명을 모집한 이날 행사는 신청 공지가 뜬 후 바로 매진됐다. 위트앤시니컬 제공
황인찬 시인이 지난 3월 낭독회에서 시를 낭독하고 있다. 선착순 30명을 모집한 이날 행사는 신청 공지가 뜬 후 바로 매진됐다. 위트앤시니컬 제공

작가도 연예인처럼

작가들이 직접 책을 읽고 집필 취지를 소개하는 생중계는 2,3년 전부터 있었다. 몇몇 서점과 출판사들이 페이스북,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출판사 홈페이지 등을 통해 가끔 ‘시험방송’ 수준으로 하던 행사가 이제 전국단위 방송을 정규적으로 내보낼 정도가 됐다. 네이버가 올 4월 자체 스튜디오를 갖추고 한 달에 2회 이상 ‘책문화판’이란 이름의 생중계를 내보내기 시작하면서다. 지난해 4월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 예루살렘히브리대학 교수의 방한 때 출판사 김영사의 요청으로 오프라인 강연을 생중계한 게 전환점이었다. 하라리가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오르는 등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면서 작가 강연 생중계를 적극 추진하게 됐고 아예 정규 프로그램으로 ‘이벤트’가 커졌다. 고주희 네이버 책문화 리더는 “2016년 생중계 라인업이 유명 작가에만 한정됐다는 점이 아쉬워 국내 작가로 폭을 넓혔고 월 2,3회 생중계 횟수도 늘렸다”고 설명했다.

네이버가 스튜디오를 제공하면 진행자 섭외와 대본 작성 등은 출판사가 전담한다. 백다흠 은행나무 편집장은 “진행자 섭외에서 대본 작성까지 2주에서 한 달이 걸린다”며 “생방송 만드는 만큼 공이 든다”고 말했다. 백 편집장은 “이정명 작가 생중계를 준비할 때는 대본은 물론 콘티까지 작성했다”고도 했다. 출판사들은 품이 많이 들고 번거로울 수 있지만 적극적이다. 오프라인으로 치르는 작가 행사 수준의 비용으로 공중파 방송 부럽지 않을 효과를 누릴 수 있어서다. 네이버가 모바일(2회)과 PC(1회)를 통해 생중계 예고 배너 광고를 무료로 노출한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김민정 난다 대표는 “공중파 방송이 아니라서 작가들이 부담을 적게 갖는데 비해 파급력은 비슷하다”며 “당장 책 판매로 이어지진 않지만 작가나 신작 인지도를 올리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시 전문 서점 위트앤시니컬이 낭독회를 위해 만든 한정판 시집. 200~500부 발간된 시집은 모두 매진됐다. 위트앤시니컬 제공.
시 전문 서점 위트앤시니컬이 낭독회를 위해 만든 한정판 시집. 200~500부 발간된 시집은 모두 매진됐다. 위트앤시니컬 제공.

충성 독자를 만들어라

작가들이 독자를 직접 만나 신작을 소개하는 낭독회 트렌드도 10년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출판사가 주축이 돼 카페 등을 빌려 무료로 진행했던 2000년대와 달리 요즘은 독립서점 기획으로 열리는 유료 낭독회가 대세다. ‘소수정예’로 열린다는 점도 최근 낭독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다. 낭독회 대부분은 시인을 포함해 20~30명 정도의 사람들만 모인다. 6월 연희동 독립서점인 ‘밤의서점’에서 열렸던 나희덕 시인의 시 낭독회는 참가자를 10명 내외로 제한했다. 규모가 큰 작가 행사는 자칫 강의를 듣는 듯한 딱딱한 인상을 주지만 참가자 수를 제한하며 작가를 가까이서 보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 대현동 위트앤시니컬을 비롯해 상암동 북바이북, 강남 북티크 등 독립서점과 북카페가 자체 낭독회 등을 여는 대표적인 곳이다.

차별화를 위해 아예 낭독회용 한정판 시집을 출간하기도 한다. 위트앤시니컬에서 열린 낭독회에서 읽은 시만 묶어 만든 한정판 시집 ‘여름의 일’(박준), ‘처음 보는 표정’(구현우 남지은 이설빈), ‘귤곰팡이나이트’(신해욱), ‘놀 것 다 놀고 먹을 것 다 먹고 그다음 사랑하는 시’(황인찬)는 200~500권 소량으로 발간돼 전부 매진됐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출판계 불황이 지속되면서 열혈 독자, 팬을 만드는 팬덤 마케팅이 주요 키워드가 됐다”며 “낭독회와 네이버 생중계 모두 팬을 확보하는 수단”이라고 분석했다. 유료 낭독회로 찾는 충성 독자를 확보하고, 생중계를 통해선 잠재적인 독자층의 특징과 취향을 반영한 책을 기획하거나 작가를 발굴한다는 것이다. 장 대표는 “이제 팬덤이 없으면 출판사가 유통업체에 끌려간다”며 “독자가 어떻게 움직이고 뭘 좋아하는지 모르면 고유의 편집 역량이 생기지 않는 시대”라고 덧붙였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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