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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잡는 과학] 모든 증거는 남편을 범인이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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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14일, 지독한 교통체증이었다. 이용순 경위(당시 마포경찰서 과학수사팀장)가 탄 차는 공덕동 사거리에 갇힌 채 앞으로 나가질 못했다. “빨리 가야 하는데…” 이 경위 마음이 새카맣게 타 들어갔다. “팀장님, 변사자 자세가 이상합니다. 사인 판단이 어렵습니다.” 20분 전 팀원인 지은배 경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14년이나 이 바닥을 누벼오면서 현장에 출동한 과학수사요원이 이처럼 다급한 목소리로 보고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지 경사도 그 때까지 10년 가까이 일하면서 얼마나 많은 변사자를 봤겠습니까. 본인이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한 거라 팀장인 저에게 전화를 한 거겠죠. 뭔가 좋지 않은 상황이구나, 쉽지 않겠구나. 그런 느낌이 들더군요.” 이 경위가 마침내 차 문을 벌컥 열었다. 사진기 등 장비를 부여잡고 공덕동 현장으로 뛰기 시작했다. 가랑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PM 5:09 A오피스텔 2201호
유명 사립 의과대학 레지던트 4년차인 백모(당시 31)씨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평소보다 훨씬 이른 오전 6시 41분 집을 나선지, 11시간 가량 지난 시간이었다. 그는 올해 전문의 시험을 치르고 입대할 생각에 한창 공부 중이었다. 합격한다면 국군서울지구병원 군의관으로 갈 계획도 세워뒀다. 하지만 어제(13일) 본 1차 시험은 예상보다 어렵게 나와 떨어지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았다고 생각했다.
안방 욕실에 발을 들인 백씨가 장모 이모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가 욕조에 넘어져 죽은 것 같아요.” 장모는 경기 안양시 집에서 택시를 타고 백씨 집으로 오는 중이었다. 아침 일찍 딸 직장(유치원)에서 온 “A가 출근을 안 했다”는 전화, 사위에게 하루 종일 전화를 걸었지만 대부분 받지 않다가 이제 한다는 말이 “아내가 죽었다.”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백씨는 장모와 통화를 마친 뒤 119와 112에 신고 전화를 걸었다. “제가 의사인데 사망한 다음에 수 시간은 지난 것 같습니다.” 백씨 휴대폰에는 이날 부재중 전화를 포함해 답장 하지 않은 문자메시지 49통이 남겨져 있었다.
PM 6:00 A오피스텔 2201호
22층 통로 제일 끝에 위치한 오피스텔(76.79㎡). 이 경위가 도착한 집 안은 이미 수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얼핏 둘러 본 내부는 말끔했다. 변사자가 발견된 곳은 특이하게도 안방 욕실 욕조였다. 변사자는 20대 후반 여성 A씨로 155㎝ 자그마한 키, 잠옷 차림에 화장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욕조를 가로질러 배를 위로 한 채 누워 있었다. 양다리는 허벅지 아래가 욕조 밖으로 나온 상태. 발바닥이 욕실 바닥을 향해 있었지만, 바닥에 닿지는 않았다. 욕조 안쪽 오른쪽 면에 뒤통수 부분이 닿아 앞쪽으로 접혀 있는 머리. 확실히 ‘이상한 자세’였다. 이 경위의 카메라 플래시가 연신 빛을 뿜어냈다. 2월 12일 출산을 앞둔 결혼 3년차 만삭의 여성, 불룩한 배가 사진 속에서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15일 AM 00:05 마포경찰서 강력팀 조사실
경찰은 일단 백씨를 유족 자격으로 조사했다. 백씨는 차분했다. “제가 기억하고 있는 건 세가지 모습밖에 없습니다.” 아침을 먹는 새 거실로 나와 TV를 보고 있었고, 씻고 나오자 옷(흰색 후드 티셔츠와 검은색 체육복 바지)을 챙겨줬다. 나갈 때는 안방에서 “잘 가라”고 인사를 했다는 게 전부라는 진술이었다.
경찰은 께름칙했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쓰러져 죽었다는 걸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그 때 마침 한 형사가 조사를 받고 나오는 백씨 팔을 보게 된 겁니다. 그게 의문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경위가 말했다. 박미옥 당시 강력계장도 뒷날 그 때를 이렇게 떠올렸다. “살인 가능성을 생각은 했지만 쉽게 말은 꺼낼 수 없는 상황이었죠. 팔이나 이마 흉터, 그걸 보고 백씨와 다시 얘기를 하게 됐는데 대답이 영 이상했습니다. 이 때부터 ‘아 살해구나’하는 의심이 커졌어요.”
백씨 이마에는 왼쪽 아래 대각선 방향으로 ‘ㄴ’자 형태 상처가 있었다. 가로 1㎝, 세로 0.5㎝ 정도 깊게 패인 왼쪽 팔뚝 상처를 포함해 양 팔뚝에는 9개가 넘는 긁힌 생채기가 남아 있었다. 오른쪽 관자놀이와 귀 밑, 왼쪽 뺨, 등과 어깨도 긁힌 상처투성이었다. ‘혹시 부부싸움을 하다가?’ 경찰은 백씨 동의 아래, 상처 부위를 모두 사진으로 남겼다. 백씨는 “피부병이 있다”고 했다.
17일 AM 10:00 국립과학연구원 부검실
박재홍 법의관 집도로 시신 부검이 시작됐다. 발견 직후 현장 검안이 이뤄졌지만 사인은 아직 ‘알 수 없었다.’ 이 경위가 부검 장면을 초조히 지켜보고 있었다. “사건이 심상치 않습니다. 부검을 꼭 해야 합니다”라고 서장 등에게 강력하게 건의한 것도 이 경위 자신이었다.
부검 결과 A씨에게 눈에 띄는 질병은 없었다. 태아도 건강했다. 독극물이나 약물 성분 역시 검출되지 않았다. 알코올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외상이 여러 곳에서 발견됐다. 목, 이마 쪽 피부가 까져 있었고, 눈가가 찢겨진 채 멍이 살짝 들어 있었다. 팔 다리에도 몇 군데 멍자국이 있었다. 결정적인 건 목 안쪽 기도 등에서 나온 내부출혈이었다. 목에 집중된 어떤 힘이 가해졌다는 뜻이었다.
국과수 법의관들이 모여 부검 결과를 놓고 치열한 검토에 들어갔다. 그 결과가 2월 1일 경찰로 전해졌다. ‘목눌림 질식의 가능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보름 후 재차 감정서가 전달됐다. 이번엔 보다 구체적이었다. ‘손에 의한 목눌림 질식사.’ 경찰은 첫 번째 부검결과가 온 다음날(2일) 백씨를 ‘부인을 살해한 피의자’로 즉각 체포했다.
2월 18일 PM 5:00 마포경찰서 강력팀 조사실
백씨는 완강했다. “평소 빈혈 증세가 있던 A가 자신이 외출한 사이, 출근 준비를 하다가 욕조 쪽으로 쓰러졌고 그 충격에 목이 접히면서 질식사했다”는 사고사 주장이었다. 경찰이 “피해자는 타살된 것”이라고 추궁하자, “누군가 집에 침입해 죽였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제3자 살해 가능성을 내놨다. 여러 주장을 내놨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나는 아니다.”
보름 전 백씨에 대해 청구한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범죄 사실 소명 부족’으로 기각됐지만, 경찰은 자신 있었다. 박미옥 계장은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는 누를 다시는 범하지 않으려고 수사 초반부터 전력을 다했다”고 했다. 두 달 넘는 시간 동안 사건 현장에서 얻는 단서, 부검을 통해 확보한 과학적인 근거. 이 경위는 “백씨의 하루 행적을 시간대별로, 분 단위로 쪼개 시뮬레이션을 할 정도로 수사는 충분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날 백씨 조사가 마지막임을 선언했다. “백씨는 자백할 뜻이 전혀 없어 보였다.”
2월 25일 AM 8:00 마포경찰서 기자실
출입기자들에게 A4 2매짜리 보도자료가 배포됐다. ‘마포 만삭 의사 부인 살해 피의자 구속.’ “피의자 백모씨가 1월 14일 오전 3시에서 6시41분 사이 피의자 아파트에서 아내 A와 불상의 이유로 다툰 뒤 손으로 아내 목을 눌러 질식사로 사망하게 하고, 사고사로 위장하기 위해 욕실 욕조에 유기했다.” 기자단 브리핑을 위해 연단에 선 최종상 당시 형사과장이 자료를 읽어 내려갔다. “이 같은 혐의가 인정돼 (법원으로부터) 백씨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질문은 범행 동기로 집중됐다. “‘불상의 이유’라는 건 왜 죽였는지는 모른다는 건가?” 최 과장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백씨가 자백을 하지 않고 있다.” 질문은 계속됐다. “경찰이 판단하는 부분이 있을 것 아닌가?” 답변이 이어졌다. “전문의 1차 시험 불합격 가능성, 게임습벽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최 과장은 백씨가 가진 컴퓨터에 97개 게임파일, 4만7,413개 판타지 소설이 저장돼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자료는 간단했지만 사실 경찰이 준비한 자료는 수백 페이지에 달했다. 최 과장은 그 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부검 결과도 추가 공개했다. A씨 손톱 밑에서 발견된 백씨 DNA, 안방 장롱 위에 던져뒀던 백씨가 입었던 옷에서 검출된 A씨 혈흔. 특히 욕실에서 발견된 A씨 얼굴에 남겨진 핏자국. “피해자 얼굴 오른 눈꼬리부위에서 오른쪽 귀 방향으로 흐른 핏자국이 있었다. 하지만 발견 당시 A씨 얼굴은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출혈 이후 (피가 마를 만큼) 일정 시간이 흐른 뒤 이동이 됐거나 자세가 변경됐다는 것이다.”
9월 15일 PM 2:00 서부지법 303호 법정
A씨 가족 등 재판정을 가득 메운 이들 눈과 귀가 법정 중앙 한병의 부장판사에게로 집중됐다. 경찰과 검찰은 3월 23일 백씨를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총 17번 공판이 열리는 동안 백씨는 여전히 무죄를 주장했다.
한 부장판사가 입을 열었다. “이 사건 범행은 목을 조를 경우 사망에 이를 수 있다는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의사인 피고인이 출산이 한 달 남짓 남은 아내를 손으로 목을 졸라 살해해 태아까지 사망에 이르게 한 것으로.”
재판부는 경찰이 제출한 증거를 대부분 인정했다. ‘정확히 언제 어디서 부인을 죽였는지’는 증명할 수 없으나, ‘A씨가 14일 새벽 백씨가 출근하기 전 집 안에서 살해당했으며 제 3자 침입 증거가 없는 이상 남편 백씨를 범인으로 봐야 마땅하다’는 결론이었다. “피고인 죄질이 매우 무거워 중형 선고가 불가피하다. 피고인을 징역 20년에 처한다.” 한 부장판사가 법봉을 ‘땅!’하고 두드렸다.
남상욱 기자 thoth@hankookilbo.com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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