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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2돌, 잊혀져 가는 독립운동] 독립운동 인정받아도 주인 못 찾아 ‘잠자는 서훈’ 33%

입력
2017.08.1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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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 매년 300~500명 발굴하지만

당사자 사망하거나 유족 못 찾아

전달 못한 건수 5469건 달해

친일파 청산 꺼렸던 이승만 정부 탓

1962년에서야 뒤늦게 보훈정책 개시

“초기 대응 놓쳐 예우 아직도 미완”

광복절을 이틀 앞둔 13일 세종특별자치시 한누리대로 2130 세종시청 외벽에 시민 손도장으로 만든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다. 세종=연합뉴스
광복절을 이틀 앞둔 13일 세종특별자치시 한누리대로 2130 세종시청 외벽에 시민 손도장으로 만든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다. 세종=연합뉴스

멕시코 이민 한인 1세대인 호근덕(1889~1975) 애국지사는 1911년부터 미주 지역 한인들이 결성한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1921년 쿠바로 이주해서도 활동을 계속했고 1930년 이후에는 광주학생항일운동 지지대회와 후원금 모금 활동을 벌였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114원86전(현재 약 3,000만원)을 모아 중국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총탄이 오가는 전투 현장에는 없었지만, ‘대한독립’을 위해 20대부터 청춘을 모두 바쳤다.

그의 독립운동은 광복 66년이 지난 2011년에 이르러서야 공식 인정을 받았다. 국가보훈처가 2005년 광복 60돌을 맞아 근현대사 전공 석ㆍ박사 20명으로 전문사료발굴분석단을 꾸리고 독립운동가 발굴에 나서면서 뒤늦게나마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보다 10년 전인 광복 50주년부터 정부가 직접 ‘알려지지 않은 독립유공자’를 찾았지만 전문가집단을 참여시켜 체계적으로 발굴에 나선 건 이때부터였다.

덕분에 독립운동 당사자나 유족이 직접 자료를 들고 유공자 신청을 해야 했던 이전과 달리 100년 이상 된 고문서를 통한 공적 확인도 가능해졌다. “일본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자료를 확보하고 분석해 매년 운동가 300~500명을 발굴하고 있다”는 게 보훈처 설명. 아직은 부족하지만 나름 성과는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정부 주도로 독립유공자를 발굴하면서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유족이 신청하는 경우는 곧바로 서훈이 전달됐지만, 정부의 자료 발굴에 따른 유공자 서훈은 전달할 당사자나 유족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맹점이 생긴 것이다. 광복 이후 여러 세대가 흘러 후손들조차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거나 기억이 희미해지는 탓도 크다. 이러다 보니 현재까지 발급된 서훈 1만4,651건 중 5,469건은 유족에게 전달되지 못해 보훈처에 보관 중이다. 독립유공자 세 명당 한 명 꼴로 주인을 못 찾고 있는 셈이다.

실제 호 지사에게 2011년 내려진 건국포장은 6년이 지나서야 유족 품에 안겼다. 호 지사는 이미 36년 전 세상을 떠난데다, ‘호근덕’이라는 한국 이름 대신 ‘페르난도 호’라는 현지 이름에 익숙한 쿠바 거주 후손들은 호 지사가 서훈 대상자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훈처에서 잠자던 호 지사 건국포장은 광주학생독립운동연구회장인 김재기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일제강점기 미주 지역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 지지대회 참가자들을 찾기 위해 지난해 쿠바를 방문하던 중 우연히 호 지사 유족을 만나면서 극적으로 긴 잠을 깨게 된다. ‘페르난도 호’가 호근덕 지사와 동일인임을 알게 된 김 교수는 보훈처를 통해 가족관계 확인에 들어갔고, 이듬해인 올 4월 드디어 호 지사 건국포장이 가족에 전달된 것이다.

호근덕 지사 후손들이 올 4월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열린 훈장 전수식에서 건국포장을 받고 있다. 광복 72년, 보훈처가 호 지사를 서훈 대상자로 발표한 지 6년 만이다. 김재기 전남대 교수 제공
호근덕 지사 후손들이 올 4월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열린 훈장 전수식에서 건국포장을 받고 있다. 광복 72년, 보훈처가 호 지사를 서훈 대상자로 발표한 지 6년 만이다. 김재기 전남대 교수 제공

김 교수는 “서훈을 발표만 할 게 아니라 후손을 찾아 전달까지 해야 의미가 있고, 그래야 비로소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가 완료되는 것”이라면서 “광복 이후 긴 세월이 흘러 후손 대부분이 3, 4대로 넘어가다 보니 조부 혹은 증조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가 호 지사처럼 서훈을 찾아주거나 가족관계가 확인돼 앞으로 전달될 예정인 쿠바 활동 독립유공자만 해도 10명이나 된다.

김 교수의 지적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보훈처에 따르면, 2012년부터 최근 5년간 선정된 독립운동 서훈 대상자는 1,792명인 반면, 서훈이 실제로 전달된 건 390건(2012년 이전 서훈 대상자도 포함)에 그친다. 이 중 유족이 포상을 신청해 서훈이 곧바로 전달된 103건을 제외하면 보훈처가 직접 유족을 찾아 전달해 준 건 5년간 기껏해야 287건에 불과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보훈처 관계자는 “발굴된 독립운동가 연고가 북한이거나 제적부가 없는 경우에는 사실상 후손을 찾기가 어렵다”고 털어놨다. 보훈처는 앞으로 제적부를 통해 후손을 추적할 수 있는 독립유공자를 900명 정도로 추산하고, 향후 대대적으로 후손을 찾는 캠페인을 실시하는 방안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아직 미완에 그치고 있는 독립운동가와 후손에 대한 예우는 뒤늦은 보훈정책 개시가 근본 원인으로 꼽힌다. 친일청산 작업을 꺼렸던 정부가 독립유공자 포상을 본격 실시한 것은 광복 17년이 지난 1962년. 방병건 광복회 의전복지국장은 “이마저도 독립유공자를 배려하려 했다기보다 6ㆍ25전쟁 참전 유공자와 월남 참전 부상자에 대한 예우를 하려다 보니 독립운동가를 무시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포함시킨 측면이 크다”고 지적했다.

‘국가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에서 통째로 묶여 다뤄지던 독립운동가들은 광복 50주년을 앞둔 94년에서야 ‘독립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에 따라 따로 분리됐다. 조세현 전 순국선열유족회 부회장은 “해방 3년 뒤 이승만 정부가 들어섰는데 그때 친일파는 처단하고 항일운동을 한 사람은 자료를 발굴해 응당 서훈을 했어야 했다”며 “중요한 시기를 놓쳐버려 자료도 사라지고 증언해 줄 사람들도 하나 둘 세상을 떠나니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유족을 찾아 서훈을 전달하는 일이 몇 배 더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정승임 기자 cho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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