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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도시에 살며 거미와 대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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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 깨는 건축학적 상상력
인류 거주공간·생활방식 실험 선봬
12개 구(球)는 미래 공중도시 상징
거미 통해 다른 종과 교감도 강조
“유토피아 도전해 쟁취해야”
예술가가 세상을 바꾸겠다고 말할 때, 세상의 외양을 변형하겠다는 뜻은 대체로 아니다. 관객의 정신을 개조하겠다는 말에 가깝다. 미의식을 북돋거나, 이타심을 증폭시키거나, 고정관념을 깨서 인간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속도를 늦추겠다는 의미의.
아르헨티나 출신 예술가 토마스 사라세노(44)는 다르다. 인류의 거주 공간과 생활 방식을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실험한다. 그 과정이 작품으로 발현된다. 사라세노의 개인전 ‘행성 그 사이의 우리(Our Interplanetary Bodies)’가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리고 있다.
어두운 전시장에 들어서면 밝게 빛나는 커다란 구(球) 12개와 마주친다. 행성을 닮은 이 물체는 하늘을 떠다니는 미래의 집 혹은 이동 수단을 상징한다. 사라세노는 인류가 화석 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땅에 발 딛지 않은 채 자유롭게 이동하며 사는 미래를 꿈꾼다. 유토피아를 그린 여느 예술가와 다른 건, 사라세노가 실현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데 있다. 그는 물리학자와 천체물리학자, 생물학자, 재료공학자 등과 함께 일하며, 미국 항공우주국(NASA),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등과 협업했다.
2015년 미국 뉴멕시코 화이트샌드에서 사라세노는 ‘에어로센(Aerocene)’이라는 ‘열 없는 열기구’에 매달린 성인 한 명이 두 시간 넘게 공중을 날아다니게 하는 데 성공했다. 버너도, 태양 전지도 없는 에어로센은 거대한 풍선 안팎 공기의 온도(비중) 차가 만들어낸 부력과 바람으로 지면에서 400~500m 높이까지 떠올랐다. 에어로센을 배낭에 넣고 다니다가 언제든 꺼내서 타고 다니는 미래, 인류가 초국가의 공간인 공중 도시에 모여 살면서 더 이상 지구를 파괴하지 않는 미래가 사라세노의 유토피아다. 사라세노는 13일 기자간담회에서 “꿈 꾸는 것만으로 유토피아가 실현되지 않는다”며 “광주민주화운동이 세상을 바꾸었듯,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한계에 도전해 쟁취해야 한다”고 했다.
구(球)의 공간을 지나면 거미줄이 기다린다. 겹겹의 거미줄엔 거미가 산다. 공중 도시보다 훨씬 더 터무니 없게 들리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관객의 움직임과 호흡, 체열은 먼지를 일으킨다. 먼지를 촬영한 3차원 이미지는 사라세노가 만든 알고리즘에 의해 기괴한 소리로 바뀐다. NASA의 도움을 받아 채집한 진짜 우주의 소리다. 스피커 40개에서 울리는 소리가 만든 진동을 느낀 거미가 반응한다. 거미는 소리, 이미지가 아닌 진동으로 소통한다고 한다. 거미가 내는 저주파 소리는 초고감도 마이크를 타고 증폭돼 관객에 다시 전해진다. 인간과 거미가 소통하는 순간이다.
먼지와 거미의 궤적은 너비 22m, 높이 15m의 새까만 스크린에 혜성 궤도를 닮은 선으로 실시간 표시된다. 스크린은 그 자체로 우주처럼 보인다. 우주의 인간은 거미와 다를 게 없는 먼지 같은 존재일 뿐, 오만하지 말라는 사라세노의 메시지다.
사라세노가 고민한 건 거미가 대표하는 다른 종(種)과의 교감이다. 다른 종과 소통하려면 감각을 날카롭게 갈고 다르게 봐야 한다. 무엇보다 겸손해져야 한다. “관객(Audience)이라는 말이 싫다. 먼지를 일으키는 사람은 전시의 일부다. 거미는 구경하는 대상이 아니다. 사람과 소통하는 동등한 생명이다. 인류는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와 연결돼 있다. 사람이 지구의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공존하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미래가 열릴 것이다.”
왜 거미를 골랐을까. 열목어가 환경 지표 생물이듯, 거미에 ‘인간과 소통 지표 생물’이 될만한 특질이 있는 걸까. 사라세노의 대답은 싱거웠다. “거미가 좋았다. 처음엔 거미줄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겼고, 이내 거미에 빠졌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처럼 설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다. 거미가 사람과 소통하며 즐거워하기 바란다.” 사라세노는 10년 넘게 거미와 거미줄을 연구하고 있다.
사라세노는 아르헨티나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독일 프랑크푸르트 명문 미술학교 슈테델슐레에서 예술을 배웠다. 그는 “건축은 소수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예술을 택했다”고 했다. 전시는 내년 3월25일까지.
광주=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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