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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처럼 조깅 하다가도 회담장에선 싸늘…사진으로 본 역대 한미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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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28일부터 다음달 2일까지 3박 5일간 정상회담 차 미국을 방문한다. 한미 양국의 새 정부가 출범한 이후 정상회담이 열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26일 전직 주미 한국대사들에게 정상회담에 대한 조언을 들은 뒤 “구체적인 성과도출보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우애와 신뢰를 쌓는데 방점을 찍겠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현안에 치중하기보다 동맹의 의미를 재고하며 큰 틀의 공조를 발전시키겠다는 뜻이다. 물론 방위비 분담금 증액,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배치나 운용 비용 합의 같은 예민한 의제가 테이블에 오른 거란 기대도 적지 않다.
첫 한미정상회담은 새 행정부의 외교 스탠스 및 대북 정책 방향을 살펴볼 수 있는 자리다. 직선제 개헌 이후 첫 선출된 제 13대 대통령부터 최근까지 역대 대통령들의 첫 한미 정상회담 풍경과 주요 쟁점을 짚어본다.
노태우 대통령: 냉전종식∙민주화 이후의 첫 국제무대 행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선출된 첫 수장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된 1988년은 냉전의 종식과 함께 세계 질서가 재편되는 시기였다. 당시 한국은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하며 대외적 위상을 드높이고 있었다. 노태우 정권은 이 같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대미 전략을 짜야 했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10월 미국을 방문해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첫 회담을 가진 이래로 재임기간 중 총 7회의 정상회담을 통해 한미관계를 유지했다. 회담을 반복하며 한미 관계는 점차 가까워졌다. 첫 정상회담 당시 노 전 대통령은 ‘공식실무방문’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을 찾았지만, 4년 후인 1991년 7월에 있었던 한미정상회담에는 1965년 박정희 전 대통령 이후 26년 만에 처음으로 ‘국빈’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이때의 회담은 냉전종식 이후의 세계질서에 대한 한미간의 공동인식을 확인한 중요한 계기가 됐다.
김영삼 정부: 조깅으로 산뜻하게 시작했건만……’포괄적 접근’ 용어 화근
김영삼 전 대통령은 8번의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대미 관계를 유지했다. 김영삼 정부 당시 주요 외교 의제로는 이전 정부에서 잠정적으로 중단됐던 한미 양국 연합군사훈련인 팀 스피리트(Team Spirit)훈련의 재개, 북핵 위기에 대한 한∙미 관계 및 평시작전통제권 환수 문제 등이 거론됐다.
1993년 7월 한국에서 첫 회동을 가진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김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함께 조깅하는 등 다정한 모습을 보였지만 공식 회담 테이블에서는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다. 미국측이 제시한 '포괄적 접근(Comprehensive Approach)'이라는 용어가 화근이었다. 같은 해 3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을 함으로써 1차 북핵 위기가 촉발된 상황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포괄적’이라는 말이 미∙북 접촉을 열어주는 것 같다며 이 표현에 반대했고 대신 '철저하고 광범위한 접근(Thorough and Broad Approach)'이라는 용어를 고수해 이를 관철시켰다.
김대중 대통령: 누군가에게 ‘자유의 영웅’ 또 다른 이에겐 ‘이 양반’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 정착과 외환위기 극복이라는 두 가지 목적에 방점을 찍고 한미 협력 관계를 형성해나갔다. 김 전 대통령은 1998년 6월 방미해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의 첫 회동을 포함해 총 9번의 회담을 가졌다.
김 전 대통령은 대북 기조인 ‘햇볕정책’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확보하고자 클린턴, 부시 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및 외무장관회담으로 공조 체제를 유지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그를 ‘자유의 영웅’이라고 칭송하는 등 극진히 대우했지만, 보수적 성향의 부시 전 대통령은 그를 냉대했다. 2001년 3월 부시 전 대통령의 취임 후 첫 정상회담에서 나온 ‘this man(이 양반)’이라는 단어는 외교 참사의 한 사례로 꼽힌다. 김 전 대통령이 햇볕 정책을 고수하려 하자 부시 전 대통령이 한 나라의 정상으로서 예의를 갖추는 대신 이 같은 즉흥적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북한 때문에 손 잡았다 등 돌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총 8번의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균형적인 동맹관계 발전을 꾀했다. 이는 국력 신장과 주권의식의 성숙을 바탕으로 치우치지 않은 한∙미 관계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커지고 있다는 판단 하에 이뤄졌다.
2003년 1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면서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눈앞에 닥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이라크 파병이란 협상에 응할 수 밖에 없었다. 같은 해 5월 14일 미국에서 있었던 첫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공동성명을 채택하고 한∙미 관계를 미래지향적이며 포괄적인 동맹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천명했다.
두 정상은 그러나 2005년 미국의 방코델타아시아(BDA) 북한 계좌 동결 문제로 등을 돌렸다. 같은 해 11월 경북 경주에서 열린 한ㆍ미정상회담에서 노 전 대통령이 북한 계좌 동결 해제를 논의하자고 요구했지만 부시 전 대통령이 이를 일축한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 미국 대통령이랑은 화기애애했건만
이명박 전 대통령은 참여정부의 ‘자주, 주권’ 기조가 미국의 대외정책과 충돌해 결과적으로 한미동맹의 신뢰가 저하됐다고 판단했다. 그는 임기 중 총 11번의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미국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주력을 다했다.
2008년 4월 부시 전 대통령과 미국에서 첫 회동한 이 전 대통령은 직접 골프 카트를 운전하는 등 다정다감한 모습을 연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이 양반’이라고 칭한 적이 있는 부시 전 대통령도 이 전 대통령만큼은 ‘친구’라며 예우했다. 그러나 방미기간 동안 타결된 미국산 쇠고기 협상 때문에 국내에서 반미감정이 격화되고 촛불집회로까지 확산되자 이명박 정부의 지지도는 도리어 하락했다.
박근혜 대통령: 공동 선언이라는 성과를 한번에 뒤덮어버린 ‘추행’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3년 5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첫 만남을 가졌다. 박 전 대통령 의 첫 한미 정상회담은 두 나라의 협력관계를 재확인 하는 데 방점이 찍혔다. 당시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60년을 맞이하며 양국 관계를 ‘포괄적 전략동맹’에서 ‘글로벌 파트너십’으로 격상하자는 내용의 ‘한미동맹 60주년 기념 공동선언’을 채택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의외의 사건이 대통령의 행보에 찬물을 끼얹었다. 대통령의 순방에 동행했던 윤창중 전 대변인이 주미 한국 대사관 인턴 직원을 성추행한 것이다. 윤 전 대변인은 현지에서 경질됐으나 정권 초 발생한 이 사건은 씻을 수 없는 오명으로 남아있다.
진은혜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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