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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미국 소방차는 왜 하얗고 푸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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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노란 소방차를 봤어요.”
라이트 형제의 첫 번째 비행 현장인 미국 아우터뱅크스(Outer Banks) 여행 이틀째, 아들 녀석은 난생 처음 보는 물체를 쫓을 양으로 유턴을 소망했지만 귓등으로 흘렸다. 잘못 봤을 거란 지레짐작도 더했다. 다음날 나도 봤다, 모래 언덕에 출동한 노란 소방차를. “왜 노랗죠?”(아들) “여긴 노란 모래가 많아서 그런가 봐.” 이 무식한 제멋대로 대답에 대해 훗날 사과해야 했다.
보름 뒤 미국 민속촌이라 불리는 윌리엄스버그(Williamsburg)에선 아내가 외쳤다. “우와, 소방차가 하얀색이에요.” 나도 즉시 봤다. 마침 소방관이 있길래 물었다. “우리 맘대로 칠하는 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에서 주민들 의사를 따라 색깔을 결정해. 더 궁금하면 이따 와, 나 지금 출동해야 해.” 최소한 소방차 색깔 결정 구조는 알게 됐다.
다시 한달 뒤 미국 최남단 키웨스트(Key West)로 향하는 길목 마을(Marathon)에서 레몬 색깔 비슷한(정확히는 Lime green) 소방차를 만났다. 알래스카, 하와이 소방차는 노랗다. 푸른 하늘이 자랑인 노스캐롤라이나 채플힐(Chapel Hill) 소방차는 하늘색(정확히는 Carolina blue)이다. 초록색 분홍색 소방차도 있다. 잇달아 직접 보니 ‘소방차는 빨갛다’는 고정관념이 깨졌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먼저 빨간색 소방차의 유래는 뭘까. 일설에 따르면 소방서 간 경쟁이 극심하던 1800년대 관내 소화전을 가장 비싼 색깔 페인트인 빨간색으로 칠하던 유행이 빨간 소방차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1920년대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보다 저렴한 차를 대량 생산하기 위해 차량 색깔로 검정색 한가지만 고수한 탓에 거리가 검게 물들자, 소방서들이 소방차를 빨간색으로 칠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유야 어떻든 빨간 소방차는 대세로 자리잡았다.
변혁은 뉴욕의 한 검안의(optometrist)가 촉발했다. 스테판 S 솔로몬이 80년대부터 천착한 연구 주제는 ‘과연 빨간 소방차는 안전한가’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는 인체공학적 이론과 다양한 실증 연구를 버무린 여러 보고서를 통해 빨간 소방차의 위험성(?)을 고발하고, “노란 빛이 도는 녹색인 라임그린(또는 Lime yellow)이 소방차 색깔로 적합하다”고 설파한다. 안전이라는 대의 앞에 붉은 아성이 무너지자 노랑을 필두로 소방차 색깔은 다양해졌다.
솔로몬은 4년간 9개 시와 75만대의 소방차 경로를 추적한 결과물을 95년 내놓으며, 굳히기에 들어갔다. 빨간 소방차가 노란 소방차보다 사고 위험이 3배나 높고, 실제 교차로 사고는 2배 많았다는 내용이다. 황색 물결이 거세지자 적색 추종자들은 논점을 흐리기 위해 어떤 색이든 불만 잘 끄고 구조만 잘 하면 된다는 미국식 흑묘백묘(黑猫白猫)론으로 맞섰다.
지루한 논란이 이어지자 2009년 미국 연방재난관리청(FEMA)은 양측 손을 모두 들어주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황색 계통이 보다 눈에 잘 띄지만, 붉은색을 응급차량 색깔로 인지하는 관습도 중요하다.’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차량 색깔을 두고도 다양한 논쟁과 다채로운 실천, 유연한 조율이 이뤄진 셈이다.
미국 소방차 색깔은 이처럼 오랜 역사와 과학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 답답할 만큼 집요하게 챙기며 타협을 거부하는 안전 의식과 실천이 스며 있다. 다양성 존중, 시민 참여, 소방관의 자부심도 깃들어 있다. 9ㆍ11테러 추모공간인 뉴욕 맨해튼 그라운드제로 푯돌엔 당시 활약한 소방차들 명단이 희생자 이름과 함께 새겨져 있을 정도다.
우리나라도 노란색 소방차를 도입한다는 2009년 기사가 있길래 살펴봤다. 소방차 이미지를 세련되게 바꾼다는 이유가 달렸지만, 정작 색깔과 안전이 긴밀하다는 배경 설명은 없다. 결과보다 과정, 겉보다 속이 더 중요할 텐데 말이다.
고찬유 사회부 차장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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