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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잡는 과학] 일가족 자살로 꾸미려 했지만…음료수병 수면제 성분 딱 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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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성탄절의 축복과 다가올 신년의 설렘이 공존하던 2014년 12월 29일. 강원 양양군 현남면 정자리 가마골의 주부 박모(38)씨 가족에게 그날은, 끔찍하고 참혹한 하루였다.
오후 9시40분, 강원경찰청 광역과학수사팀(속초권) 홍종현 팀장과 최형준 경사에게 화재 발생 신고가 접수됐다. 마을 전체를 다 해봐야 10여 가구가 전부인 조그만 동네, 그곳에서 유달리 외딴 곳에 자리를 잡은 박씨 집이 갑작스런 화마에 속수무책 무너지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두운 밤, 늘어선 소방차들의 불빛과 솟구치는 잿빛 연기에 마을 주민들은 “이걸 어째”라는 탄식을 내뱉고 있었다.
홍 팀장 등이 현장에 도착한 오후 10시20분쯤. 박씨의 큰 아들(당시 13) 주검이 들것에 실려 나왔다. 2층 주택에 1층 세입자 가족은 마침 집을 비우고 있어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2층에 살고 있던 박씨와 3남매(아들 둘, 딸 한 명), 일가족은 참변을 피할 수 없었다. 살아남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당에는 어떤 폭발의 힘으로, 튕겨져 나간 듯한 2층 안방 창틀과 유리창이 산산조각 난 채 흩어져 있었고, 불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던 2층은 시커먼 연기가 자욱했다.
홍 팀장과 최 경사는 곧장 집 안으로 들어갔다. 큰 불은 잡혔지만 잔불은 여전히 남아 있던 상태였다. “화재 현장은 증거가 불타거나 진화 과정에서 훼손되기 쉬워 초기 모습을 남기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이라고 홍 팀장은 말했다. 실수로 인한 화재냐, 누군가 고의로 지른 방화냐를 알려면, 다 타버리기 전에 모습을 하나라도 더 보고 기록해야 했다. 그리고 그 기록에서, 발화부 위치나 시신 배열 등의 작은 힌트에서 ‘왜 화재가 발생했는지’ 답을 찾아내는 게 이들의 임무이자 목표였다.
현장은 암흑이었다. 당장 새까만 연기가 앞을 가려, 1m 앞이 겨우 보일까 말까였다. 매캐한 연기가 코를 찔렀고, 발목까지 가득 찬 진화용 소방용수 때문에 발을 쉽게 디딜 수도 없었다. 설상가상 방진마스크 등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탓에 그 곳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길어봐야 5분이었다. 최 경사는 손전등을 비추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고, 홍 팀장은 시신이 발견된 모습과 위치를 소방관에게 물어 나갔다.
화재의 원인은 당장 알 수가 없었다. 창틀이 밖으로 튕겨나갈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해 가스폭발을 의심했지만, 가스밸브와 가스 선에는 이상이 없었다. “박씨가 평소 생활고와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주민 증언이 있어 자녀살해후자살의 가능성도 생각해봤지만,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없었다.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았다.
30일 오전 1시, 시신 검시가 시작됐다. 정확한 사인을 밝혀내기 위한 외표(外表) 검사. 시신에 상처나 골절이 있는지, 코에 그을음이 있는지, 입 안에 음식물이 있는지 등 시신 외부를 살피는 검사였다. 망자들의 코에 집어넣은 면봉에서 ‘매(煤·호흡기에 검게 달라 붙은 그을음)’가 공통적으로 묻어 나왔다. 코 등 호흡기로 숨을 쉬는 순간 그을음이 들어갔다는 것으로, 불이 난 이후에도 살아있었다는 ‘활력징후(vital sign)’에 해당했다. 화재에 의한 질식사였다.
박씨와 딸(당시 9)의 시신 발바닥과 발등에서는 검은 재가 묻어 나왔다. “불길을 피해 움직였다는 뜻”이라고 홍 팀장은 해석했다. 특히 딸의 눈에는 붉은 가로선의 흔적이 또렷이 남아 있었다. ‘불길을 피해 움직이기 직전까지’ 가까운 거리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뜬 눈으로 지켜보다 입은 화상이었다. “9세 소녀의 두 눈에 비친 불길은 얼마나 뜨거웠을까”, 검시요원 중 누군가 혼잣말을 내뱉었다.
마침 현장감식에서 봐 두었던 장면이 홍 팀장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거실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두 아들. 그 중 이불을 덮은 채 숨을 거둔 큰 아들에게서는 오른쪽 허벅지에서 액체가 흐른 듯한 물결무늬 화상인 ‘물결흔’이 포착됐다. 일반적으로 물결흔은 사람 위에 기름을 직접 뿌린 상태에서 불이 붙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 ‘누군가 이불을 덮고 있는 아이에게 휘발유 등을 뿌린 뒤 불을 붙였다’는 추정이 가능했다. 홍 팀장은 “어떤 부모도 이렇게 참혹하게 아이들을 죽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시신이 발견된 모습과 장소도 뭔가 이상했다. 보통 부모가 자녀와 함께 죽는 걸 택할 경우 온 가족이 모여있기 마련인데, 두 아들은 거실, 모녀는 작은 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화염 속에 고통을 느낀 이들은 본능적으로 출구를 향하는데, 피해자 박씨와 딸은 창문이 가로막힌, 출구가 없는 작은 방으로 대피했다. 출입문이 잠겨있지 않았던 것도 통상의 자살 현장과는 달랐다. 타살 쪽으로 무게중심은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제3자의 방화 가능성을 입증할 단서가 절실히 필요했다.”
30일 오전 9시부터 다시 현장감식이 이뤄졌다. 경험상 답은 현장에 있었다. 2층 거실은 뼈대만 남은 소파와 바닥에 널브러진 텔레비전, 타다 만 가재도구들과 옷가지 등으로 난장판이었다. 바닥에 흥건한 물을 바가지로 퍼내고, 소형 삽으로 바닥에 들어 붙은 재를 긁어냈다. 몇 시간의 작업 끝에, 발화점으로 추정되는 주황색 전기장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기선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아 전기로 인한 화재 가능성은 없었다.
대신 휘발유 냄새가 과학수사요원들의 코 끝을 스쳤다. 혹시나 하고 장판을 들친 최 경사의 손에 미끌미끌한 기름이 만져졌다. 거실과 안방에서 채취한 액체로 간이실험을 한 결과, 기름성분 감지기에서 양성 반응이 나왔다. 역시나 방화였다, 살인이었다.
경찰은 박씨의 남편을 수사선상에 먼저 올렸다. “불이 나기 전, 멀리 떨어져 사는 남편과 시동생이 박씨 집을 방문했다”는 목격자 진술을 확보했다. 이어 화재 발생 몇 시간 전인 오후 2시쯤, 남편이 박씨 집을 찾아와 세 자녀와 장을 보고는 오후 4시30분쯤 집을 떠난 사실이 확인됐다. 하지만 아이들을 보고는 곧장 강릉의 집으로 돌아갔다는 그의 알리바이는 폐쇄회로(CC)TV로 입증됐다.
단서는 의외의 곳에서 드러났다. 박씨의 친한 친구 가정주부 이모(41)씨의 경찰 진술에서였다. 둘은 초등학교 학부모모임을 통해 친해진 사이. 이씨는 “죽은 박씨가 자신에게 1,400만원 상당의 빚을 질 정도로 생활고가 심했고, 남편과의 불화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진술했다. 그러던 이씨가 갑자기 묻지도 않은 ‘휘발유’에 대해 언급하며 사망원인을 자살로 몰아가려는 태도를 보였다. “박씨를 구하려 다섯 번이나 집 안에 들어갔다”는 진술도 현장 소방관의 증언과 달랐다. 경찰의 의심은 짙어가는데, 조사 내내 친구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느낌이 왔다.
물증도 나왔다. 2일 오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네 가족의 시신에서 수면제 성분인 졸피뎀이 검출됐다”는 결과를 보내왔다. 피해자 박씨는 평소 수면제를 처방 받은 적이 없었다. 반면 친구 이씨가 화재 당일 오후에 졸피뎀 성분이 포함된 수면제 28알을 구입한 기록을 경찰은 확보하고 있었다. 마침 화재 현장 현관과 계단에서 발견된 맥주병과 음료수병에서도 졸피뎀 성분이 검출됐다.
추가 증거도 범인으로 이씨를 지목했다. 과학수사요원들이 신발장 다섯째 칸에서 발견한 차용증과 거래내역서는 박씨가 친구 이씨에게 1,880만원 상당을 빌려줬음을 알렸다. ‘자신이 돈을 빌려줬다’는 이씨 진술과는 상반되는 내용이었다. 여기에 피해자의 휴대폰과 라이터 기름통 등이 잿더미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씨가 친구 박씨에게 빌린 돈을 갚지 않으려 수면제를 탄 맥주와 음료수를 네 가족에게 먹인 후 휘발유를 뿌려 방화한 것. 멀리 살던 남편이 방문한 때를 노릴 만큼 범행은 계획적이었다.
이씨의 범행 후 행적도 형사들의 기를 차게 했다. 이씨는 범행 직후 차를 타고 사건 현장을 벗어나 3.5㎞ 정도(차로 7분) 떨어진 현남파출소 부근에서 2분 가량 기다렸다가, 마치 화재가 나는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곁을 지나던 소방차를 따라 화재 현장을 다시 찾았다. 이씨는 소방관의 만류에도 “집안에 사람이 있어요, 살려주세요”라고 절규하며 화재현장에 함께 들어가려 하기도 했다. “이미 죽은 것을 알면서도, 범행을 감추기 위해 알리바이 액션을 취한 것”이라고 경찰은 말했다. 이씨는 피해자의 유가족들에게 “박씨에게 돈을 빌려줬다”며 대신 갚으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사람이 아닌 악마가 있죠, 느껴보셨나요”라고 경찰은 말했다.
이씨의 방화는 처음이 아니었다. 사건 3일 전 강릉에 사는 내연남을 상대로 수면제를 먹이고 불을 질러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실이 경찰 조사에서 드러났다. 내연남의 보험금을 받기 위해 보험금 수령자를 본인으로 바꾼 지 3일 후였다. 당시 내연남이 화상을 심하게 입은 데다 수면제를 너무 많이 복용해 단기 기억상실에 빠진 탓에 이씨의 범행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게다가 이씨에게는 5년간 1년에 1, 2번은 화상진료를 받은 기록이 남아 있었다. 형사들은 “보통 사람이 평생 한 번 입을까 말까 한 화상을 매년 겪은 것이 과연 우연일까”라고 되물었다.
경찰은 이씨를 건조물방화치사 및 강도살인 혐의로 구속해 재판에 넘겼다. 1·2심 법원은 혐의를 모두 인정,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2,000만원이 안 되는 돈, ‘일가족이 처참히 죽어야 했던’ 이유였다.
양양=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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