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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목놓아 부른 4인의 5·18열사 이야기

입력
2017.05.1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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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대통령이 18일 광주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고영권 기자
문재인대통령이 18일 광주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고영권 기자

18일 제37주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기념사가 눈길을 끌면서 대통령이 직접 언급한 4명의 열사에 대해서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기념사에서 “5월의 죽음과 광주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세상에 알리려 했던 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도 함께 기리고 싶다”라며 네 사람을 소개했다. 이들은 누구일까.

광주민주화운동의 서막 연 박관현

박관현
박관현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는 수많은 열사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박관현 열사는 운동의 서막을 연 사람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1980년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 열사는 5월16일 오후 6시에 구 전남도청 앞 광장 분수대 앞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횃불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이날 “꺼지지 않는 횃불과 같이 우리 민주의 열정을 온 누리에 밝히자는 뜻에서 (중략) 이 자리에 모였다”라며 “우리의 요구와 주장은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민주화 일정을 밝히는 것”이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연설을 마친 그는 사람들을 이끌고 평화행진을 진행하는 등 5·18 직전까지 광주 시민과 학생들의 반독재투쟁을 주도했다. 하지만 5월17일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재야 인사들이 하나 둘 잡혀 들어가기 시작하자 박 열사는 여수로 도피했다. 주변의 권유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는 죄책감을 죽을 때까지 덜지 못했다. 박 열사는 1982년 4월 체포돼 1심에서 5년형을 선고 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 하지만 항소심 도중 진상규명을 위해 40일간의 단식을 진행하다 안타깝게 옥사했다.

시간이 흘러 민주화운동 관련자 대부분이 재심을 통해 무죄를 인정받자, 박 열사의 누나 박행순씨도 동생의 명예회복을 위해 2012년에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광주지법은 “항소심 재판 중 숨져 1심 유죄 판결이 공소기각으로 효력을 잃었다”며 재심청구를 기각했다.

분신자살로 생 마감한 표정두

표정두
표정두

표정두 열사는 1980년 당시 고등학생 신분으로 항쟁에 참여했다가 정학처분을 받았을 정도로 사회정의감이 투철했다. 이후 1983년에 호남대에 입학했으나 가정환경이 어려워 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3년 만에 제적당했다. 이듬해 하남공단 신흥금속에 입사한 표 열사는 미국과 군부독재가 저지른 광주항쟁의 만행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그러던 중 그 유명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불합리한 세상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표 열사는 서울 세종문화회관 근처 하적장 부근에서 몸에 불을 붙인 후 “박종철을 살려내라” “광주사태 책임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주한미국대사관 앞으로 달리다 쓰러졌다. 이후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사망했다.

표 열사는 2001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최근 모교인 호남대가 주요시설을 쌍촌캠퍼스에서 광산캠퍼스로 이전하면서 그의 추모비를 방치해 논란이 일고 있다. “졸업장이 아닌 제적된 학생은 본교 학생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게 학교 측 입장이다. 현재 추모비는 철거 위기에 처해있다.

신부를 꿈꿨던 순수청년 조성만

조성만
조성만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조성만 열사는 신부가 되길 꿈꾸며 가톨릭신학대학교에 입학하고자 했으나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서울대 화학과에 진학했다. 그가 대학생이 된 1984년은 학생민주화 운동의 물꼬가 트이던 시기다. 당시 가톨릭 청년들은 여러 단체를 조식해 사회 운동을 주도하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가톨릭 청년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했던 조 열사는 자연스럽게 암울한 사회현실에 눈떴고,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던 자연대 지하서클에도 가입했다.

조 열사가 보다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을 하기 시작한 건 제대 직후인 1987년부터다. 당시 그는 “온몸으로 살지 못하는 내 자신이 너무 한심스럽다”라며 서서히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곤 민주화운동 8년을 맞이한 이듬해 5월 15일 명동성당 구내 교육관 4층 옥상에서 준비해둔 유서를 뿌리고 할복, 투신했다. 그는 유서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한 우리의 형제들이 고통 받고 있다”며 이 같은 현실은 “기성세대에 대한 처절한 반항과, 우리 후손에게 자랑스러운 조국을 남겨주어야 한다는 의무감만을 깊게 간직하게 했다”라고 적었다. 당시 장례식에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이 참석할 정도로 그의 죽음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조 열사의 시신은 이후 광주 망월동으로 옮겨졌는데, 시신 운구차량을 보기 위해 전남도청에 모인 시민수가 30만명에 달했다.

”나의 죽음이 마지막 죽음이길…” 박래전

박래전
박래전

1982년 숭실대 국문학과에 진학한 박래전 열사의 장래희망은 ‘시인’이었다. 하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는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1987년 6월항쟁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대선에서 민주화운동 당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노태우씨가 대통령이 된 것. 하지만 사람들은 1년 전과 달랐다. 군사정권 타도를 외치기 보다 각자의 일상에 집중하기 바빴고, 또 한 편으론 88올림픽에 대한 기대로 들떠있었다. 박 열사는 그런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그 해 6월 숭실대 학생회관 옥상에 올라가 “광주는 살아있다! 군사파쇼 타도하자”를 외치곤 몸에 불을 붙였다. 박 열사의 죽음 이후 인권운동가가 된 그의 형 박래군씨는 한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사람이 죽어도 미동도 안 하고 관심도 안 보이는 현실에 대해 (동생과) 얘기했던 게 기억난다. 그게 마지막으로 본 동생 모습이다”라고 말했다.

이후 박래전 열사는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고, 보상금 1억5,000만원이 유족에게 전달됐다. 그러나 가족들은 박 열사의 뜻을 기리는 차원에서 이를 인권단체에 기부했다.

김진주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왼쪽부터 박관현, 표정두, 조성만, 박래전 열사.
왼쪽부터 박관현, 표정두, 조성만, 박래전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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