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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기억] AI, 뒷북 때려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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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헤드라인에 AI가 등장하면 요즘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을 먼저 떠올리기 쉽지만 이전에는 조류독감(Avian Influenza)이 우선이었다. 두 단어가 동시에 제목으로 사용될 때는 활자 밑 괄호 안을 잘 살펴봐야 한다.
2008년 5월은 전국적으로 조류인플루엔자가(AI)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다. 4월 초 전북 김제에서 처음 발견된 이후 호남과 영남, 충남을 거쳐 북상하던 AI는 그동안 청정지역으로 남았던 서울까지 확산되기 이르렀다.
5월 6일 농림수산식품부가 서울 광진구청 동물사육장에서 키우다 폐사한 꿩과 닭 등을 검사한 결과 ‘고병원성 AI’로 밝혀졌다고 공식 발표하면서 전국은 큰 혼란에 빠졌다.
지방에서 발생하면 크게 주목 받지 못하던 사건도 서울에서 터지면 비중이 확 달라진다. 그만큼 유동 인구 및 기반시설에 미치는 영향이 큰 이유도 있겠다. 당장 인근 어린이대공원부터 비상이 걸렸다. 하루 전날인 어린이날 공원 나들이에 나섰던 상춘객이 무려 50만여 명, 공원 측은 저녁에서야 꿩을 비롯한 조류 63마리를 살처분하고 대대적인 소독에 나섰지만 조류와 함께 사진 찍는 행사도 예정대로 진행했던 터라 수 많은 시민들이 무방비상태로 위험지역에 노출되고 말았다.
다음날부터 서울 전역은 비상 경계령과 함께 대대적인 방역작업 및 살처분이 시작됐다. 어린이대공원은 물론 80마리의 홍학들이 군무를 펼치던 서울대공원 ‘홍학쇼’와 에버랜드의 명물 ‘판타스틱 윙스’ 공연도 중단됐고 서울역광장과 보라매공원의 비둘기들은 인간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다. 얼마 전까지 친근했던 참새, 까치, 앵무새와 철새, 텃새 등 모든 날개 달린 짐승들이 회피 대상이 된 것이다.
시민불안이 확산되자 당국은 대대적인 조류 포획작업에 돌입했다. 5월 7일 광진구청은 구청공무원과 119구조대, 해병전우회 등을 소집해 관내 건국대학교 일감호에 서식하던 40여 마리의 조류 소탕작전에 나섰다. 하지만 이날 이들이 포획한 조류는 달랑 1마리, 120명이 동원돼 하루 종일 보트를 타고 누볐지만 결과는 웃지 못할 정도로 허탈했다.
광진구에서 시작해 송파 문정, 장지지구로 번져가던 AI는 5월 12일 발생한 중국 쓰촨성 대지진 기사에 밀려 언론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커다란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살처분과 격리 외에는 확실한 사후 대책도 마련하지 못한 채 시간은 흘렀고 9년이 지난 올해 초에도 AI는 예외 없이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갔다.
사진 속 거위는 이날 전직 해병대원의 몽둥이를 피해 목숨을 건졌다. 웃고 넘기기엔 씁쓸했던 그날의 기억이다.
손용석 멀티미디어 부장 st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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