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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33년 셰프 “60 넘어 푸드트럭으로 인생 2막”

입력
2017.04.0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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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주방보조로 서울대 입성

교수식당ㆍ기숙사ㆍ직원식당 거쳐

대기업들 들어오며 뜻밖의 실직

서울 여의도물빛광장에서 '밤도깨비야시장'이 열린 지난달 31일 오후 33년 경력 서울대 셰프 출신 이경재(오른쪽)씨가 푸드트럭에 올라 츄러스를 만들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서울 여의도물빛광장에서 '밤도깨비야시장'이 열린 지난달 31일 오후 33년 경력 서울대 셰프 출신 이경재(오른쪽)씨가 푸드트럭에 올라 츄러스를 만들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하와이 여행 중 눈에 띈 푸드트럭

“이거다, 나도 할 수 있겠다”

츄러스에 매료돼 요리법 개발

퇴직 3개월 만의 사업 ‘유명세’

운전하랴, 톡톡 튀는 메뉴 만들랴, 흥취까지 발산하랴. 소자본 창업아이템 푸드트럭의 미덕이다. 몇 해 전부터 중앙 지방 가릴 것 없이 관에서 청년 취업난 해소 대책으로 밀어붙이니 유행처럼 번졌다. ‘푸드트럭은 청년들의 전유물’이라는 꼬리표까지 달렸다.

적어도 이경재(65)씨는 온몸으로 이런 상식을 뒤엎는다. 자의 반 타의 반 ‘할배츄러스’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스냅백이라 불리는 야구모자를 눌러쓴 그는 푸드트럭업계를 장악(?)한 젊은이들과 벌써 2년째 자웅을 겨루고 있다. 평일 경기 김포한강신도시, 주말은 서울시가 여의도한강공원 등 도심 곳곳에 마련한 밤도깨비야시장이 그의 ‘인생 2막’ 무대다.

지난달 31일 밤 여의도물빛광장에 설치된 이씨의 푸드트럭 앞은 북적거리는 40명 남짓 손님들과 “맛있게 먹어요”라는 이씨와 부인 김정미(58)씨의 외침이 하모니를 이뤘다. 그는 “츄러스로 제2의 인생을 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호탕하게 웃었다. “맛있게 먹어주는 손님을 보면 절로 행복해요. 더 맛있게, 더 친절하게 해야죠.”

그는 서울대 내 교수식당, 기숙사, 직원식당 등 거의 모든 식당을 거친 셰프였다. 주말엔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열리는 결혼식 음식도 만들었다. “1979년 주방보조로 처음 서울대에 들어갔는데, 2년 뒤(81년)에 양식조리사자격증을 따면서 (셰프로) 데뷔했어요. 사실 70년부터 식당에서 요리하고 군대에서 취사병으로 일했으니 ‘비공식’ 기간까지 따지면 더 오래됐죠.”

서울대가 법인화(2011년)되면서 “평생 요리밖에 몰랐다”는 이씨에게 위기가 닥쳤다. “학교에서 ‘경비원 자리로 옮기는 게 어떠냐’고 하더라고요, 학교가 대기업들이랑 식당계약을 체결하면서 우릴 내쫓을 수밖에 없었던 거죠.” 2014년 12월, 이씨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바친 학교를 그렇게 허무하게 떠났다. 서울대 셰프 이력은 33년 만에 막을 내렸다.

가족들은 적적해하던 이씨에게 여행을 제안했다. 훌쩍 찾아간 하와이에서 그는 ‘뜻밖의 기회’를 만났다. “내 나이 또래쯤 됐을까, 해변가에 트럭을 세워두고 음식을 파는데 젊은이들이랑 편하게 얘기도 해 가면서… 어찌나 부럽던지. 문득 ‘이거다, 나도 할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가족들은 반대했다. 나이 들어 바깥에서 일하는 게 걱정스럽고, 명망 있는 셰프가 ‘트럭에서 음식을 판다’는 소릴 듣는 것도 원치 않았다. 이씨는 “수십 년을 손님들에게 음식 대접하고 살아왔으니 맛에서든, 서비스에서든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다”고 설득, 작은 중고트럭을 샀다. 우연히 맛본 츄러스에 매료돼 요리법도 직접 개발했다. “쫄깃한 맛을 살렸어요, 찹쌀가루를 넣은 비법이 효과를 봤죠.”

2015년 3월, 퇴직 3개월 만에 시작한 장사는 순풍을 달았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츄러스를 파는 게 신기했던지 판매 사흘 만에 인터넷에 제 사진이 떴다고 하데요. 아는 체 하는 손님도 늘고, 무엇보다 다시 일을 시작했다는 게 너무 좋았어요.”

내친 김에 그는 지난해부터 주말마다 푸드트럭의 성지라 불리는 밤도깨비야시장을 찾는다. 오전 6시에 일어나 직접 반죽을 하고 밤 10시까지 내로라하는 젊은 참가자들과 실력을 겨루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유명세를 타니 동업하자는 꼬드김도, 사업을 키워보자는 제안도 들어온다. “욕심부리지 않고 일하고 싶어요. 손님 하나하나 소홀하지 않고, 한마디라도 더 나누고 싶어요. 오랫동안.”

“올해는 길이도 절반, 가격도 절반인 어린이메뉴(약 25㎝)도 선보였어요. 하하하.” 그가 건네는 1,000원짜리 츄러스엔 달콤함은 기본, 해맑은 그의 웃음은 덤으로 맛볼 수 있다.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이경재씨의 푸드트럭 앞이 츄러스를 기다리는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이경재씨의 푸드트럭 앞이 츄러스를 기다리는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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