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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팽목항… 먹먹했던 취재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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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23일 세월호가 떠올랐다. 긴 기다림이 믿기지 않게 어느 날 갑자기. 2014년의 잔인했던 봄, 그 비극의 현장에 있던 기자들이 떠올랐다. 머문 시간들은 각기 달랐지만 전대미문의 참사를 기록해야 했던 그들에게 23일은 특별한 날이었다. 당시 사회부 사건기자였던 5명을 카톡방으로 불러 모았다. 카톡방 답지 않게 입은 쉽게 떼지지 않았다. 불찰이었다. 담담하게 내보일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달, 해마다 다시 찾은 그 바다는, 이들에게도 화인(火印)처럼 남은 상처였다. 문답으로 받아본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쓰리고 아팠다.
“제발 미수습자들 찾았으면…” “멍해진 하루”
다시팽목항= 울컥했고 미수습자 가족분들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단원고 은화양 어머니, 동생과 조카를 잃은 권오복 형님, 누님을 기다리는 이영호 형… 바다 위로 나온 세월호에 제발 미수습자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참사 당시 29일을 진도에 머물렀고, 이후 광화문에서, 법정에서 유족들을 만났다. 그 사이 두 번 더 진도에 내려갔고, 이번이 네 번째다. 문제는 3년이나 지났는데 나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정확한 사고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거다. 비극의 끝이 어디인지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죽을 때까지 이보다 더 큰 참사 취재는 없을 것 같고, 없어야 한다.
소다박=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참사 이후 관련 취재를 계속 하면서 유족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모든 순간을 목격할 때마다 '이 업보를 도대체 어떻게 풀려고 하나' 싶었다. 떠오른 세월호를 보니 ‘희생자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푸는 여정을 이제 시작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갈 길이 멀겠지만.
컬쳐양= 견습기자였던 그 해 6월 팽목항을 찾았다. 그때도 11명의 미수습자가 있었는데 아직 9명의 미수습자가 있다는 기막힌 사실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가족분들이 3년 내내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셨다니… 나는 부서도 옮기고 해가 가는 걸 느끼며 살았는데, 그분들에겐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았을 거란 생각에 죄송한 마음이 앞섰다.
바이바이스=감정 컨트롤을 잘 한다고 생각했다. 기자를 하며 참담한 현장도 많이 봤고 이런저런 싫은 소리는 셀 수 없이 들었다. 육두문자도 쿨하게 넘길 수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23일 새벽 수면 위로 드러난 세월호 선체를 보고 멍해졌다. 하루 종일 온 몸에 힘이 없었다. 입맛도 사라져 취재원과의 점심약속도 취소하고 애꿎은 담배만 피웠다. 3년 만에 올라온 그 배, 아직 못 찾은 9명과 그들을 3년간 기다린 유족들에게 자꾸 감정이입이 됐다. ‘내가 저 상황이었다면….’ 어린이집에 있을 딸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오늘도영장=2014년 참사 당시가 생각나서 가슴이 다시 먹먹해졌다. 진도에 내려가기 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희생자 지인의 사연을 듣고 갓길에 차 세워놓고 울다가 출근한 기억, 현장에서 맞닥뜨린 유족들의 분노와 눈물,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동거차도 주민들이 생각나 힘들었다. 배 올라오는 것 보고 당시 참사 취재를 함께 했던 선배와 술 한 잔을 기울였다.
잊혀지지 않는 고통, 잊지 못할 사람들
다시팽목항= 참사 첫날 밤, 낚싯배를 타고 사고 해역으로 가서 거의 다 잠긴 세월호 일부를 직접 봤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아무런 구조작업도 없었다. 단원고 학생의 어머니가 너무나 고요한, 아무 것도 없는 그 광경을 보고서 주저앉았다. 엄마가 배 안에서 나오지 못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던 30대 딸도 망연자실했다. 너무나 충격을 받아서 울음소리도 제대로 안 나오는 그런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딸은 ‘차례로 구조된다니 걱정 말고 기다리래’라고 쓰여진 엄마의 문자메시지를 보여줬다.
주검을 실은 배가 들어오던 팽목항 부두에 있었을 때가 가장 고통스러웠다. 날카로운 칼 같은 비명이 매일 밤하늘을 찢고 내 귀를 찢었다. 하얀 천막 안에서 시신을 감싼 천을 열어 피붙이를 확인하고는 터져 나오는 비명. 한동안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힘들다. 아들ㆍ딸의 같은 반 친구가 사망자로 확인됐을 때 엄마들이 서너 분씩 한번에 다 쓰러지던 광경도 잊을 수 없다. 이게 얼마나 엄청난 참사였는지 현장에 있던 사람이 아니면 실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늘도영장= 1주기 때 2주 정도 진도에 머물면서 동거차도에 다녀왔다. 유족, 미수습자 가족들과 함께 배를 타고 사고 해역에 간 날이었다. 사고 해역을 알리는 부표가 보일 때부터 가족들이 자신의 가족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취재하던 기자들도 모두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금도 그때 생각에 눈물이 난다. 가슴이 아프고 답답하다.
컬쳐양= 김초원 선생님의 아버지께선 날 보면 너무나 딸이 생각난다고 하셨다. 기자들 얼굴도 보기 싫다고 했던 다른 가족과 달리, 라면을 끓여 주시며 딸 얘기를 꺼내놓으셨다. 당시 딸의 시신은 찾았지만 아직 제자들이 바다에 남아있다며 진도로 매주 내려오셨던 것 같다. 그 후 기간제 교사들은 순직인정이 되지 않는다는 점 등을 기사로 쓰며 몇 번 더 연락을 드렸다. 딸을 잃은 뒤 일도 더 이상 할 수 없어 고향으로 내려가신 아버지의 카카오톡 프로필은 여전히 딸의 사진이다.
당시 바지선을 함께 타고 바다로 나간 적도 있었는데 뜨거운 햇볕에 얼굴이 까맣게 타버린 가족분들의 얼굴, 숨을 몰아 쉬던 잠수사들의 얼굴이 아직 생생하다. 그 때 바다에서 캐리어를 하나 끌어올렸다. 수학여행을 고대하며 챙겼을 옷가지와 명찰. 그 아이는 이미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물에 젖은 캐리어가 건져 올려진 장면이 선명하다.
소다박= 장례식장에 있다 보면 시신이 수습돼 오고 그 가족들이 오열하는 장면을 끝없이 보게 된다. 단원고 학생의 시신이 수습되던 어느 날, 엄마와 중학생쯤 돼 보이는 딸, 그리고 더 어린 딸 셋이 시신을 확인하러 온 적이 있었다. 시신 안치실에서 나와서 울던 엄마가 아이들에게 "이제 산 사람은 살아야 해… 너희들이 더 강하게…"라고 이야기 하더라. 중학생 딸이 울면서 세차게 고개를 가로 젓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울면서 인터뷰… “땅으로 꺼지고 싶었다”
오늘도영장= 어디서나 그렇지만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분들을 취재하는 게 가장 힘들다. 시신을 찾았다는 공지에 유족들은 긴장이 가득한 얼굴로 시신을 보러 갔다. 그리고 시신을 확인해서 자신의 가족이 아니면 얼굴에 안도감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드러났다. 그런 분들에게 뭔가를 물어야 한다니. 시신을 찾은 분들은 울면서 안산으로, 고향으로 떠나 갔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목포에서 시신 탐색 작업을 한 잠수사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 분은 부둥켜 안고 있던 단원고 학생 둘을 발견했다. 얼마나 꽉 껴안고 있었는지 두 학생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잠수사가 “이제 따뜻한 곳에 가자. 아저씨가 데려다 줄게. 이제 그만 가자”고 마음 속으로 되뇌자 스르르 팔을 풀었다고 했다. 인터뷰 도중 둘 다 우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소다박= 몸이 힘든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직업적 회의가 들던 순간순간에는 땅으로 꺼져버리고 싶었다.
바이바이스= 4월 17일 새벽 목포에 도착해 후배를 팽목항으로 보내고 후방을 맡았다. 수사를 하는 목포해양경찰서, 광주지검 등이 담당이었다. 목포해경서 민원실이나 로비에서 24시간을 보냈다. 식사는 대충 때우고 토막 잠을 잤어도 몸이 힘들진 않았다. 하지만 스트레스로 머리가죽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300여명이 배와 함께 가라앉았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괴로웠다. 팽목항에서 감정의 극한을 경험하고 있는 후배들에 대한 마음의 빚도 컸다. 후방에 있던 나보다 몇 배는 고생했다.
다시팽목항= 안 힘들었던 적이 없었다. 늘 가장 힘들었다. 이보다 더 고통스러운 취재는 내 인생에 절대 없어야 한다.
누구를 위한 기사인가
소다박= 세월호 초기 상황을 겪고 일주일 만에 서울로 돌아와서는 '나도 기레기 중 하나일 뿐인데 계속 이 일을 하는 게 세상에 도움이 되는 건가'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초기에 내려온 기자들은 대부분 1~3년차 기자들이 많았고, 이들 중 상당수는 장례식장에서 어떻게 유족들에게 말을 붙여야 하는지도 몰랐다. "지금 심정이 어떠신가요"를 묻는 기자에게 유족이 욕도 못하고 허탈한 얼굴로 바라보던 게 기억이 난다. 이러한 미증유의 참사에서 내가 이들에게 힘이 되지는 못할망정 이들을 힘들게 하는 '악의 무리'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는 게 견디기 어려웠다. 기본적인 취재윤리도 지켜지지 않은 현장은 악몽이었다.
다시팽목항= ‘기레기’라는 말에 상처도 받았지만 스스로 취재를 제대로 못한다고 생각할 때 자괴감에 빠졌다. 이런 감정도 참사 초반이 아니라 20일쯤 머문 뒤부터였던 것 같다. 초반에는 그런 생각조차 사치였다. 정부 발표도 엉망이고, 허위 인터뷰에, 오보가 줄을 이었다. 실종자 가족들이 믿고 의지할 곳이 없는 상황이었다.
오늘도영장= 내가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걸 절감할 때 기자로서 괴로움을 느꼈다. 고작 한다는 게 중앙대책본부가 제대로 하고 있나 지적하는 정도였다. 5월 어느 날 해경 쪽에서 사망자 숫자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발표에 나선 적이 있었다. 바락바락 악을 쓰며 질문했던 게 그나마 위로가 됐다.
바이바이스= 온라인에는 [단독]이, 방송에서는 “단독으로 전해드립니다”란 멘트가 넘쳐났다. 수백 명의 죽음 앞에서, 그것도 대다수 희생자가 어린 학생들인데 이런저런 단독은 끊임 없이 이어졌다. ‘세월호 전원 구조’ 단체 오보를 낸 언론들의 단독 경쟁이라니… 천안함 사태도 겪었지만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다. 수많은 이들의 슬픔 속에서 기사를 끄집어 내야 한다는 기자의 업보가 너무나 큰 굴레로 느껴졌다. 당장 벗어 던지고 싶을 만큼.
컬쳐양= 지난해에는 세월호 2주기 기획기사로 단원고 생존학생들 이야기를 썼다. 아이들에게 바로 전화하는 건 너무 미안한 일이라 부모님들에 먼저 전화를 드렸다. 수십 건 전화를 돌려도 인터뷰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을 듣는 건 3명도 안 됐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진도에서 당시 실종자 가족들을 인터뷰할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누구를 위한 취재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너무 힘들었다. 이분들의 이야기를 잊히지 않게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본인들이 그 이야기를 하는 걸 이렇게 힘들어 하는데... 나는 대체 누굴 위해 기사를 쓰려고 하는 건지 스스로 확신이 서질 않았다. 단순히 기사를 위한 기사를 쓰는 건 아니었는지.
정리=박선영기자 philo9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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