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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진’ 그랜저의 명성, 그리고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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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현대 그랜저 가죽 시트의 때 아닌 주름으로 온라인이 한바탕 시끄러웠다. 사태를 지켜보며 가죽과 고급 승용차의 함수를 되새겨본다. ‘난 알아요’를 들으며 힙합 춤을 췄던 ‘서태지와 아이들’ 세대에게 그랜저란 다시 말해 부와 영광의 동의어였다. 쉽게 탈 수 없는, 지금으로 따지자면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 급의 위상에 버금갔으리라. 그랬던 차가 2017년에 와서는 대중화의 첨병이 되었다는 사실이 아직까지도 낯설다. 가죽 시트의 주름 파동은 고객들의 금간 기대 심리와도 일정 부분 얽힐 것이다. 솔직히 현대차 편드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시트 가죽에는 주름이 생겨나기 마련 아닌가? 너무 일러서 문제겠지만.
내게 가죽 소재는 추억이라는 메타포다. ‘쎄무’ 재킷 특유의 알싸한 향은 군 출신 아버지의 그리움과도 같다. 방학 때마다 기차를 타고 부임지를 찾으면 마중 나온 아버지가 어린 날 번쩍 안아줄 때의 그 포근함, 실은 그게 담배 냄새였으며 쎄무가 아닌 스웨이드라는 이름의 소재라는걸 철든 이후에야 알았으니. 요즘은 동물보호를 위해 실제와 구별조차 어려운 인공 가죽까지 만드는 시대지만, 내 군시절 때만 해도 선임의 전역 앨범을 수놓기 위해 뱀을 잡아 표피를 벗겨내곤 했다. 돌이켜보면 가죽은 지난 세월을 머금은 묘한 마력을 갖고 있었다. 인공 가죽인 알칸타라 소재는 감히 흉내 내지 못할, 삶과 죽음의 표식 같은 상징성이 있다.
“오랜 세월 살아낸 훈장과도 같은 징표랄까요? 거칠게 움푹 파인 인간의 주름살은 처연하지만, 가죽에 켜켜이 쌓인 세월의 더께는 오히려 멋스럽습니다. 이를테면 나 스스로의 가죽적 취향인데 숨 쉬던 존재의 껍질을 떼어내 곱게 말려 시간을 포갠 듯한 그 질감 말입니다. 구석기 시대에 내재된 유전자 때문인지 몰라도 저는 가죽만 보면 무지하고 갖고 싶어 침샘이 폭발하죠. 특히 잘 태닝된 베지터블 가죽 제품의 근사한 디자인에다 오랜 시간이 주는 오묘한 질감마저 겹쳐지면 나도 모르게 지갑을 열고 맙니다.”
보테가베네타 장지갑의 위빙 표면을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웅얼거린다. 속물 같아도 어쩔 수 없다. 가죽 특유의 질감에 세월이 새긴 나만의 흔적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니까. 그게 바로 영국을 갔을 때 반세기 전의 우체부가 갖고 있던 빈티지 메신저 백을 보자마자 바로 구매한 심리적 이유일 것이다. 투박하고 질긴 할리데이비슨 가죽 부츠가 좋아 평상화로 신고 다니던 시절도 있었고 차는 팔았어도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가죽 키홀더는 언제까지고 간직해왔다. 철 지난 아버지의 ‘무스탕’ 재킷을 유품 삼아 농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사내가 바로 나다.
가죽 아이템에 흥미가 없다면 카 레이서나 모터사이클 라이더의 가죽 슈트를 떠올려보라. 달리 표현하면 거친 환경 앞에서 질긴 방어막을 필요로 하던 원시인의 생존적 본능을 상징한다. 그러니까 가죽으로 만들어 원피스로 제작한 경주용 슈트는 목숨을 담보로 시공을 넘나드는 ‘용자’를 위한 최소한의 보호막(나약한 피부에 덧댄)이란 말이다. 생명! 아이러니하지만 동물의 죽은 표피가 드러내는 그 맛을 달리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랜저 가죽 시트의 주름에서 시작된 푸념이 가죽 예찬으로 흘렀다. 요는 이렇다. 에쿠스라는 이름이 없어지고 제네시스가 독립 브랜드가 됐지만 아직도 그랜저는 최소한 ‘니어 럭셔리’를 상징한다. 고객들의 눈높이는 여전하다는 말이다. 가죽 시트를 만들 때 착석 부위의 압력을 고려해 면을 분할하거나, 솔기를 주는 제작 방식 등 주름 따위를 개선하는 방법은 많다. 에르메스의 손길이 깃든 에쿠스와 프라다와 협업했던 제네시스를 통해 현대자동차는 명품 브랜드의 가죽을 다루는 기술적 접근법을 이미 곁에서 확인한 바 있다.
고개를 돌려 제네시스 EQ900, 아니 G80만 보더라도 단박에 알 수 있다. 시트 정도는 충분히 제대로 만들 수 있는 회사임을! “자사의 가죽 품질은 전혀 문제가 없지만 하도 시끄러우니 같은 제품으로 바꿔는 주겠다”는 현대차의 대처, 그리고 “제네시스 브랜드와는 엄연히 가격 차이가 있다”는 주장은 그랜저 고객들에게 억지스러운 변명으로 느껴질 것이다. 비슷한 가격대의 렉서스 엔트리 모델 IS만 곁눈질해봐도 내구력은 높이면서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하고 고급스럽게 만든 가죽 시트는 부지기수니까.
“현대자동차여, 부디 기술탐미적인 브랜드로 거듭나시라.” 나 같은 가죽 애호가가 선뜻 현대차를 구매하기 위해 지갑을 열 수 있도록 말이다. 존재감 없는 아슬란을 빼고는 그랜저야말로 현대자동차를 대표하는 최고급차이며 브랜드의 얼굴 마담 아니던가!
최민관 기자 edito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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