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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살며] 푸틴 때리기

입력
2017.02.24 18:28

한국 언론에서 ‘푸틴의 때리기 법’이라는 명칭이 붙은 법안이 러시아에서 통과됐다. 러시아 진보파의 반대가 컸지만 밖에서는 사소해 보였다. 가족 폭력을 사실상 허용한 법을 쉽게 만든 것 자체가 푸틴의 독재를 확인시켰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나도 이 법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몇 가지 오해는 풀어야 할 듯하다.

우선 이 법은 푸틴이 추진한 게 아니다. 러시아 하원 ‘두마’의 다수파인 통합러시아당의 제안이었다. 입법권을 가진 국회가 법을 만들고, 행정권을 가진 대통령은 이에 서명했을 뿐이다. 물론 대통령에게는 거부권이 있지만, 이번에 이를 행사하지 않았던 데는 분명한 이유도 있다. 다음으로, 가정 폭력이라는 범죄에 대한 법적 처벌을 폐지한 게 아니라 처벌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형사법이 아닌 행정법으로 규제 수단을 옮기자는 것이 입법 취지라고 통합러시아당은 설명한다.

이런 설명은 러시아 지방도시에서 일어난 한 사건이 이번 입법의 직접적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도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다. 페르미시에서 한 가난한 집안의 12세 딸이 엄마 가방에서 몰래 돈을 훔쳐서 화가 난 엄마에게 몇 차례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맞았다. 엄마를 싫어하는 딸이 이혼해서 따로 사는 아빠에게 이를 알렸고, 그는 전처에게 복수할 겸 즉각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러시아 형사법에 따르면 경찰은 살인과 같은 심각한 범죄나 확실한 물적 증거가 있는 경범죄만 신고받을 수 있다. 엄마가 딸을 때린 확실한 근거가 없어 범죄 신고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다. 이 사건에 대한 '두마' 의원들의 생각은 가정 폭력 사건 대부분이 형사법에 걸리기 어려운 현실을 감안해 가정 폭력을 행정법의 규율 아래로 옮겨 처벌해야겠다는 것이었다. 행정법은 목격자 증언이나 간접 증거를 근거로 신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러시아의 가정 폭력은 통제하기 쉬워지고, 법적 처벌도 수월해졌다.

물론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딴판이다. 과거에는 형사법에 걸릴 정도의 가정 폭력 범죄자는 당연히 엄한 처벌을 받았으나 앞으로는 기껏해야 벌금형을 받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아내나 아이를 때리고도 벌금만 내면 그만이라는 지적이다. 범죄와 처벌 사이의 균형성이 깨졌다는 것이 이들의 인식이다. 한편으로 더욱 극단적인 반대론자들은 초범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벌금형조차 부과하지 않는 점을 비난했다. 반복적 가정 폭력은 단죄하지만, 한 번은 눈감아 주자는 완화책은 결국 가정폭력을 허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답으로 ‘두마’가 꺼내 든 것은 러시아 전통 문화 이야기다. 러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가정 안의 일은 가정 안에서 해결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국가가 가정의 문지방을 넘어 가족 사이의 일에 관여하면 안 된다는 게 오랜 상식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가정을 이루어 그 안에서 아이를 키우고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은 그 가족의 사생활이어서 국가가 간섭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게 러시아 사람들의 보편적 생각이다. 남편이 바람을 피울 경우 아내가 남편을 용서하든 화가 나서 집에서 쫓아내든, 이는 둘 사이의 문제일 뿐 외부로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국가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도 관여하면 안 된다는 게 러시아 전통의 가족관이다. 이런 사고가 보수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오랜 문화인 만큼 쉽게 바꾸기 어렵다.

푸틴이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현재의 러시아 정권은 극단적 보수파이고, 가족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전근대적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결과적으로 가정 폭력에 대한 처벌을 완화한 이 법은 러시아 내외에서 비판을 불렀다. 오랜 전통문화라는 점을 방패로 삼으려는 러시아 보수파는 러시아 사회를 미래가 아닌 과거로 되돌려 보내려는 생각인가 하고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리야 벨랴코프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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