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인물 360˚] 고영태, 그가 그린 진짜 ‘그림’은?

입력
2017.02.11 09:00
구독
고영태씨가 지난해 10월 31일 최순실게이트와 관련해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본부의 1박2일 조사를 받은 뒤 귀가하고 있다. 최원석 코리아타임스 기자.
고영태씨가 지난해 10월 31일 최순실게이트와 관련해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본부의 1박2일 조사를 받은 뒤 귀가하고 있다. 최원석 코리아타임스 기자.

“빵 터져서 날아가면 이게 다 우리 거니까”

이 남자, 정말 말만 하면 빵 터뜨린다. 10일 연합뉴스TV가 고영태(41) 더블루K 전 이사와 측근 김모씨의 지난해 8월 통화내용을 보도하자 국민들은 혼란에 빠졌다. 지난 6일 국정농단 9차 공판에서 고씨가 K스포츠재단 사무총장을 몰아내고 재단을 장악하겠다고 말한 녹취록이 공개된 데 이어 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워 온 정황이 더해진 것이다.

고씨는 최순실 게이트를 열어젖힌 첫 번째 제보자인데다 지난해 12월 국정농단 청문회에 출석해 성실하게 답변에 임하면서 ‘정의로운 폭로자’라는 이미지를 얻었다. 지난달에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의 증인으로 소환됐지만 출석하지 않고 잠적하자 ‘고발의 대가로 위험에 처한 게 아니냐’며 고씨를 걱정하는 여론까지 일었다. 그러나 최순실 게이트가 열린 지 약 6개월이 지난 지금,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고씨의 마키아벨리적 면모가 드러나고 있다.

‘내부자들’ 안상구(이병헌)와 “넘나 닮은 것”

영화 ‘내부자들’에서 깡패 안상구(이병헌)는 유명 신문사 논설주간인 이강희(백윤식)과 함께 대선주자ㆍ대기업 회장의 비리 등을 대신 처리하는 행동책이 된다. 쇼박스 제공
영화 ‘내부자들’에서 깡패 안상구(이병헌)는 유명 신문사 논설주간인 이강희(백윤식)과 함께 대선주자ㆍ대기업 회장의 비리 등을 대신 처리하는 행동책이 된다. 쇼박스 제공

고영태씨가 내부고발자냐는 명제에 많은 사람들이 쉽게 동의하지 못한다. ‘내부고발자’라는 단어가 주는 도덕적이고 선한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고씨가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꿀 중대한 비리를 폭로한 것은 맞지만, 그만큼 ‘최순실 게이트’ 시작에 깊이 가담한 잘못도 무시할 수 없다. 내부비리를 폭로하기 전인 2015년까지도 고씨는 최순실(61ㆍ구속기소)씨의 국내 주소지인 신사동 M빌딩 바로 옆 건물에 비밀 아지트를 두고 있었다. 고씨는 그곳에서 최씨 주변인사들과 미르ㆍK스포츠재단의 설립ㆍ운영, 더블루K 등 최씨 소유의 법인들을 통한 재단 사업 관여 등을 논의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고씨가 직접 밝힌 내용만 봐도 그는 긴밀하게 최씨를 도왔다. 고씨는 가방브랜드인 ‘빌로밀로’를 운영하던 지난 2011년 최씨를 만난 뒤 그의 주문을 받아 박 대통령의 가방과 옷을 제작했고, 최씨가 청와대에 인선 관련 서류를 전달할 때 이영선 청와대 경호관(전 행정관)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더블루K의 이사로서 K스포즈재단의 기금 사유화 계획에 협조한 것은 물론이다

때문에 고씨는 줄곧 2015년 말 개봉한 영화 ‘내부자들’속 정치깡패 안상구(이병헌)와 비교돼왔다. 정ㆍ재계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회장님’이 된 안상구가 재벌 회장에게 배신을 당하고 복수를 계획한 내용이 고씨의 행보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고씨 스스로도 한 인터뷰에서 “친구가 ‘영태 너도 나중에 (안상구처럼) 손 잘리는 거 아냐?’라고 했다”며 “그 영화처럼 나쁜 일을 막을 수 있으면 해피엔딩일 것”이라고 말했다.

오직 고영태만이 할 수 있던 일

지난 6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국정농단 9차 공판에 출석한 최순실(왼쪽)씨와 고영태씨는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진 뒤 처음으로 법정에서 대면해 서로의 약점을 파고들며 언쟁을 벌였다. 뉴시스
지난 6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국정농단 9차 공판에 출석한 최순실(왼쪽)씨와 고영태씨는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진 뒤 처음으로 법정에서 대면해 서로의 약점을 파고들며 언쟁을 벌였다. 뉴시스

고영태는 김씨와의 통화에서 ‘그림을 짜고 있다’고 말한다. 일각에서 추측하는 것처럼 그의 그림은 K스포츠재단 장악일 수도 있고, ‘정유라의 개를 집에 두고 밖에 나갔다고 돌아선’(국정조사특위 2차 청문회) 최순실에 대한 복수일 수도 있다.

고씨의 의도가 무엇이든, 그가 진실을 밝힐 ‘키맨’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고씨가 최씨의 측근 중의 측근으로 국정농단과 이권개입에 관여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거의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씨가 보고 듣고 폭로한 내용들은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한 여론의 변곡점이나 특검 수사의 쟁점이 돼 왔다. “더블루K 사무실에서 최씨가 ‘프린터가 안 된다’고 해서 최씨 방에 들어갔더니 노트북 화면에 연설문 같은 게 쓰여 있었다”(2017년 2월 6일ㆍ국정농단 9차 공판) “청와대 비서들이 최씨의 개인비서처럼 했다… 최씨는 김 전 차관도 수행비서로 보았다”(2016년 12월 8일 국정조사특위 2차 청문회) 이 같은 핵심 발언들과 더불어,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전국경제인연합을 통해 삼성ㆍ롯데 등의 미르재단 지원을 종용한 일, 윤전추 이영선 청와대 행정관과 최씨의 관계를 가늠할 수 있는 ‘의상실 동영상’을 폭로한 것도 모두 그다.

만약 고씨가 우연한 계기로 폭로를 결심하지 않게 됐다면, 국민들이 박 대통령의 국정농단 책임을 물을 기회는 없었을 수도 있다. 때문에 그의 제보가 갖는 공익적 효과를 생각하면 그 의도와 관계없이 최소한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김용환 공익제보자와함께하는모임 대표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제보자들을 무조건 영웅화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의 증언이 공익에 기여하는 바를 생각해 최소한의 신분보장과 신변보호는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국민들이 응원해주셔서 더 창피하게 느껴진다”

그림 4 고영태씨가 지난 6일 국정농단 9차 공판에 증인으로 참석하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으로 향하고 있다. 고영권 기자
그림 4 고영태씨가 지난 6일 국정농단 9차 공판에 증인으로 참석하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으로 향하고 있다. 고영권 기자

통화 내용이 공개된 직후인 10일 오후 보도된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고영태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최순실씨의 구성원으로 일했기 때문에 창피해서 고개를 들지 못한다. 국민들이 응원해주셔서 더 창피하게 느껴진다.”

고씨의 말이 진심일 수도 있고, 자신을 향한 비난을 피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쪽이든 국민들은 이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전자라면 국민의 관심은 고씨를 진정한 ‘공익제보자’로 이끌 수 있고, 후자라면 만약 고씨가 나쁜 의도를 품을 때 비판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가 그렸던 그림이 무엇이든, 아직 ‘최순실 게이트’라는 작품은 완성되지 못했다. 국정농단 사태의 마지막 장면에서 고영태는 과연 어떤 이름을 얻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