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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준중형의 시작 ‘엘란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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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의 준중형세단은 1990년 등장한 엘란트라를 꼽을 수 있다. 스텔라가 Y프로젝트를 통해 중형인 쏘나타로 진화했고, J프로젝트로 등장한 엘란트라는 준중형 시장을 개척하며 시장을 한결 풍요롭게 만들었다. 엘란트라는 소형승용차로 시작했지만 이후 아반떼에 바통을 이어주며 자연스럽게 준중형 승용차의 원조가 됐다.
엘란트라의 생일은 1990년 10월 25일이다. 이날 서울 삼성동 종합전시관 3층 올림피아홀에서 신차발표회가 열렸다. 판매가격은 1.6 DOHC가 799만원, 1.5 GLS는 721만원, 1.5 GLI는 649만원이었다. 이에 앞서 현대차는 10월 23일 울산공장에 엘란트라를 생산하는 연산 24만대 규모의 제3공장 준공식을 가졌다.
90년대 초반 우리나라는 88올림픽을 마친 이후 본격적인 자동차 보급기에 접어들었다. 당시의 화두는 고출력. 자동차 세금이 배기량을 기준으로 부과되기 때문에 엔진 배기량을 그대로 두고 흡배기 효율을 높이는 방식인 DOHC 엔진은 최적의 대안이었다. 일본차와 겨룰 수 있는 고성능의 고급 소형승용차를 개발하는 게 목표였다. 개발 초기에는 사륜구동시스템까지 적용하는 방안을 고려했지만 최종적으로 이는 반영되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현대차는 일본 미쓰비시자동차를 통해 기술을 전수받는 상황이었다. 엘란트라 역시 엔진 변속기 섀시 등을 미쓰비시로부터 들여왔다. 디자인은 이탈디자인과 영국의 인터내셔널 오토디자인에 외주를 준 뒤 현대차가 마무리했다. 당시 자료를 살펴보면, 엘란트라 개발과 관련해 이탈디자인에 142만 달러를 지불했다. 미쓰비시에는 10억 엔을 선불로 지불한 뒤 대당 1만3,700엔(수동변속기 차 기준) 가량을 기술료로 지불했다. 현대차는 제조원가를 낮추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 모두 1,150개의 부품을 국산화하기도 했다.
86년 3월부터 본격 개발에 나선 현대차는 88년과 89년 해외 테스트를 진행했다. 89년 여름에는 미국 피닉스, 데스밸리에서 혹서지역 테스트를, 88년과 89년 겨울에는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캐나다 오파사티가를 찾아 혹한기 테스트를 진행해 제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정통 유럽 스타일을 내걸고 등장한 엘란트라는 리어램프와 이어지는 백패널 리어가니시가 인상적이었다. 볼륨감을 살리고 뒷창의 경사각을 크게 해 전체적으로 돌고래 형상을 이뤘다고 현대차는 설명했다. ABS에 벤틸레이티드 브레이크, X자형 브레이크 라인 등 고성능 세단에 걸맞는 브레이크 시스템 확보에도 정성을 들였다.
반응은 뜨거웠다. 판매를 시작한 첫 달에 경쟁차인 기아 캐피탈을 제치고 시장 1위에 올라섰고 12월부터는 중소형차 시장점유율 50%를 넘겼다. 엘란트라보다 한 달 앞서 발표하며 시장 선점을 노렸던 대우차 에스페로는 판매부진으로 고전하게 된다.
91년 2월부터 본격 수출에 나선 엘란트라는 미국 호주 등 해외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결국 엘란트라는 94년 단일 모델 누적 판매 100만대를 넘기는 대기록을 세운다. 91~93년 오스트레일리아 랠리 비개조 부문에서 연속 1위를 차지한 것도 판매 확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기아차가 인수한 로터스 엘란과 이름이 비슷해 일부 해외 시장에서는 엘란트라라는 이름대신 ‘란트라’라는 이름을 써야 했다. 반대로 국내에서는 기아차가 ‘엘란2’ 라는 이름을 사용하려 했으나 현대차가 엘란트라와 비슷하다며 반발해 그냥 ‘엘란’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현대차는 이후 아반떼 시대를 열었지만 미국 시장에서는 여전히 엘란트라란 이름으로 판매하고 있다. 전작 엘란트라의 이미지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포르쉐 911과 독일 아우토반에서 경쟁하며 함께 달리는 내용을 담은 엘란트라 CF는 두고두고 회자되는 얘깃거리다.
오토다이어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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