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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저우언라이(周恩來)와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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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톈진(天津)의 난카이대학 남문 앞에는 연중 내내 정치인과 일반시민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 있다. 중국에서 ‘영원한 총리’로 추앙받는 저우언라이(周恩來) 기념관이다. 1998년 2월 28일 저우언라이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그가 공부했던 난카이대학 근처에 반려자이자 평생동지였던 부인 덩잉차오(鄧穎超)를 함께 추모하는 장소가 마련됐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毛澤東)ㆍ펑더화이(彭德懷)ㆍ주더(朱德) 등과 함께 중국 공산혁명을 이끌었고, 역대 최장수 총리로 신중국의 안정적인 착근을 이뤄낸 정치인이자 미중 수교를 견인해낸 뛰어난 외교전략가였다. 문화혁명의 광기 속에서 자금성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유산을 지켜내 유네스코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고, 덩샤오핑(鄧小平)의 든든한 후견인을 자처했을 만큼 미래를 보는 식견도 있었다.
냉전이 한창이던 1976년 1월 8일 그가 사망한 날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기가 걸렸다는 사실에선 그에 대한 국제사회의 평가를 엿볼 수 있고, 문화혁명 4인방이 그를 추모하는 화환을 철거한 데 분노한 200여만명이 같은 해 4월 4일 천안문광장에 모여 ‘요마가 우리의 애도를 막는다면 전 인민이 궐기하여 타도하리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인 데에선 그에 대한 인민의 존경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다.
근래 저우언라이에 대한 추모 분위기가 다소 엉뚱한 계기로 또 다시 달궈지는 모양이다. 지난달 초 중국판 트위터로 불리는 웨이보(微博)에서 있었던 작은 소동 때문이다. 저우언라이 기념관을 다녀온 두 젊은이가 “왜 지금은 가슴 따뜻하게 우리를 보듬어줄 정치지도자가 없는가”라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가 공안에 체포돼 조사받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설픈 인과관계로 볼 때 허구일 개연성이 높아 보이지만 서점가에선 ‘저우언라이 평전’의 판매량이 급증했다고 한다.
중국 관영매체에선 꽤나 이름있는 공산당 간부가 저우언라이 기념관을 찾았다는 기사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전ㆍ현직 지도부가 모여 권력구도를 논의하는 베이다이허(北戴河) 회의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와 같은 중요한 일정을 앞둔 시점에는 그 빈도도 잦아진다. 새해에는 가을에 제19차 당대회가 예정돼 있는 만큼 1년 내내 비슷한 류의 기사를 접하게 될 듯하다. 다른 어떤 혁명성지 방문보다도 ‘인민의 벗’ 저우언라이를 추모하는 모습을 통해 당성을 과시하려는 인사들이 많을 테니 말이다.
저우언라이 재조명 현상을 목도하면서 문득 김근태 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을 떠올렸다. 지난 29일 김 전 상임고문의 5주기 추모식에 야권의 정당 지도부와 대선주자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저마다 ‘김근태 정신’을 거론하며 내년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이루겠다고 다짐했다. 야권 인사들에게 ‘김근태’라는 이름 석 자는 그 누구보다 뚜렷한 정치적 명분일 수 있다. 그의 정치역정은 어느 한 순간도 예외 없이 원칙과 신뢰와 통합이었고, 그가 앞세운 민주대연합에는 정치권의 통합을 넘는 국민통합이 자리잡고 있어서 항상 더뎌 보였지만 단 한번의 예외 없이 진솔했고 따뜻했기 때문이다.
김근태 이름 석 자 앞에는 ‘민주주의자’가 붙는다. 비선실세 국정농단 사태로 광화문광장에 백만이 넘는 촛불이 밝혀진 데에는 피와 땀과 눈물로 일궈낸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현주소에 대한 분노가 있다. 대선 결과가 어떠하든 김근태의 삶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신념과 열정이 오늘 이 시간에도 수많은 민주주의자들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김근태가 비록 대통령의 꿈을 이루진 못했고 그래서 그의 이름을 낯설어하는 국민이 여전히 많겠지만, 10년 넘게 수많은 정치인을 만나면서 존경한다는 한 마디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그런 정치인을 만났던 건 정말 큰 행운이다.
베이징=양정대 특파원 torc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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