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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의 불편한 시선] 롤스로이스 SUV, 그게 최선입니까

입력
2016.12.15 14:00

“사막의 롤스로이스는 레인지로버에 붙은 말이지

사막으로 들어온 롤스로이스에 붙는 칭호가 아니다”

얼마 전 해외 자동차 매체에서 BMW 그룹의 럭셔리 브랜드 롤스로이스가 테스트하고 있는 SUV, 프로젝트 코드네임 컬리넌(Cullinan)에 대한 기사를 봤다. 이미 올 3월에 같은 회사의 세단 모델인 팬텀의 보디를 변형한 테스트카 사진을 공개한 적도 있었고, 최근 10년 동안 거의 모든 자동차 회사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 역할을 해온 SUV 분야이기에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었다. 게다가 같은 영국 기반의 프리미엄 브랜드인 벤틀리조차 SUV를 만드는 세상이고 보면, 굳이 삐딱하게 볼 일은 아닌 것 같긴 하다.

롤스로이스가 테스트하고 있는 SUV, 프로젝트 코드네임 컬리넌.
롤스로이스가 테스트하고 있는 SUV, 프로젝트 코드네임 컬리넌.

그럼에도 불편하다. 롤스로이스는 그 이름 자체가 하나의 세그먼트이자 기준이었다. BMW 그룹으로 주인이 바뀐 후 첫 차인 팬텀은 세단이라는 세그먼트에 가둬 두기에는 너무도 독특했기 때문이다.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았고 그 스스로가 우뚝 서 있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 이후에 드롭헤드 쿠페나 좀 더 작은 고스트 등으로 가지치기를 했지만, 그들도 모두 ‘롤스로이스’였을 뿐 기존의 자동차 시장에서 경쟁하는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메르세데스 벤츠조차 마이바흐라는 이름의 경쟁자를 내놓았지만 처참한 실패를 당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이들이 SUV를 만들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히나 럭셔리 SUV에는 원조 중의 원조인 레인지로버가 있다. 급은 약간 떨어지겠지만 미국에서는 독보적인 캐딜락 에스컬레이드도 멀쩡히 잘 버티고 있다. 이미 존재하는 세그먼트에서, 저들과 함께 경쟁하고 같은 급이 되어 버린다. 롤스로이스라는, 세그먼트와 브랜드를 넘어서는 독립적인 자동차가 아니라 그냥 SUV 중의 하나가 되어 버린다. 핫한 SUV 시장에서 연간 몇 백 대를 팔아 얻는 수익보다 브랜드가 받을 타격이 더 크지 않을까?

위장막을 두른 롤스로이스의 SUV 컬리넌.
위장막을 두른 롤스로이스의 SUV 컬리넌.

이는 형제였던 벤틀리가 겪은 과거와 비교할 수 있다. 벤틀리가 폭스바겐 그룹에 합병된 후의 일이다. 폭스바겐의 골칫거리이자 돈 잡아 먹는 귀신이나 다름 없었던 D1 플랫폼(페이튼의 기본이 된)을 바탕으로 영국의 고전적인 인테리어로 고급함을 더한 컨티넨탈 GT와 플라잉 스퍼 모델을 내놓으며 부활에 성공했다. 이는 판매와 수익에서의 성공을 뜻하는 것으로 아우디스러운 인테리어 버튼들과 독일차스러운 달리기 성능 등은 ‘벤틀리의 전통을 무시했다’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공장을 새롭게 만들다시피 하고 수천억 원의 투자를 한 폭스바겐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겠지만, 그게 명품 브랜드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장사꾼’의 관점으로 접근한다는 시각에 대한 답변이 될 수는 없었다. 차는 잘 팔렸지만, 벤틀리 경주차가 르망24시 내구레이스에서 우승했을 때도 ‘역시 벤틀리!’라는 생각보다 ‘벤틀리의 탈을 쓴 아우디 경주차로 마케팅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반쯤 포기한 상태에서 만난 벤테이가라는 첫 SUV는 그냥 그러려니 했던 것 같다.

이렇게 수익과 숫자에 몰두해 브랜드의 정통성을 파괴하는 행태들, 게다가 본인이 개척하고 창조한 세그먼트를 스스로 버리는 악수(惡手)들에는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다. 우리나라의 예를 들어보자. 최근에 론칭한 현대자동차 그랜저는 우리나라 고급차 시장의 선두 주자나 다름없었다. 변형 모델이었지만 위급인 다이너스티가 나오고 에쿠스까지 출시하면서 그룹 내 넘버 3까지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랜저=고급차’의 공식은 꽤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젊어진 그랜저 XG와 매끈했던 TG가 나와도 마찬가지였다.

아슬란과 제네시스 사이에서 기함의 상징성을 잃어버린 현대 그랜저 IG.
아슬란과 제네시스 사이에서 기함의 상징성을 잃어버린 현대 그랜저 IG.

이게 꼬이기 시작한 건 어설픈 상위 모델인 아슬란의 론칭과 제네시스 브랜드의 독립 이후다. 프리미엄 브랜드를 표방한 제네시스가 떨어져 나갔지만, 현대차 브랜드 안에서 최고는 늦게 들어온 아슬란이 차지하고 있으니 그랜저의 위치가 묘해진 것이다. ‘네가 공부를 너무 잘하면 형이 바보처럼 보이잖아’라는, 이상한 프레임에 걸린 이번 세대의 그랜저 IG는 평범함을 온 몸에 두르고 말았다. 자신이 개척하고 주도하고 있던 고급차라는 이미지와 시장에서 스스로 물러나야 하는 모순에 빠진 것이다.

브랜드와 모델이 가진 정체성과 정의를 버리면 이런 일이 발생한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브랜드에 장사, 그러니까 숫자와 수익이 끼어들면 이렇게 된다. 게다가 시장이 있고 살 사람이 있다는 판단이 선 순간부터 더욱 빠르게 변질된다. 사막의 롤스로이스는 레인지로버에 붙은 말이지 사막으로 들어온 롤스로이스에 붙는 칭호가 아니다. 정통성은 만들기도 유지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브랜드를 칭송하게 되는 것이다. 그 어려운 것을 잘 하고 있기 때문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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