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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급자족 도시ㆍ자가수리 카페…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삶

입력
2016.11.23 20:00

만드는 손은 생각하는 손이다. 만들어보면 안다. 아무리 간단해 보이는 것도 생각대로 잘 만들기 어렵다는 것을. 돌도끼를 만들던 석기시대 인류를 상상해보자. 적당한 돌을 고르는 일부터 알맞은 크기로 잘라 다듬고 갈아서, 이왕이면 더 매끈하게 만들려고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을 것이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얻는 기술과 지식, 지혜는 손이 찾아내고 완성한 것이다.

생각하는 손이 만들어내는 것은 물건만이 아니다. 만들고 배우고 나누는 오늘의 메이커운동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실험으로 나아간다. 사회를 혁신하고 세계를 재구성하는 실험에 만드는 사람들은 생각하는 손으로 참여한다. 전세계 팹랩 네트워크가 중심이 돼 추진 중인 ‘팹시티’ 프로젝트는 그 대표적 사례다.

2054년까지 자급자족률 50%

지역 자원에 환경친화 기술 더해

지속가능한 도시 네트워크 만드는

팹시티 운동, 16개 도시 동참

쓰다가 망가지면 버리는 대신

생활기술로 고쳐 쓰는 자가수리

수리카페 중심으로 확산되는 중

자급자족 도시에 도전하는 팹시티 프로잭트에 참여하고 있는 도시와 지역을 보여주는 지도. 왼쪽 상단의 숫자는 목표 기한인 2054년까지 남은 시간을 카운트다운하는 시계다. Fabcity.cc
자급자족 도시에 도전하는 팹시티 프로잭트에 참여하고 있는 도시와 지역을 보여주는 지도. 왼쪽 상단의 숫자는 목표 기한인 2054년까지 남은 시간을 카운트다운하는 시계다. Fabcity.cc

자급자족 도시의 꿈

오늘날 도시는 가장 거대한 소비처다. 재료와 제품은 먼 데서 생산되어 도시로 오는 과정에 지구의 수명을 단축하는 탄소 발자국을 남긴다. 생산 능력을 잃어버린 도시의 삶은 외부 조건에 휘둘리며 불안하게 지속된다.

팹시티는 2054년까지 도시의 자급자족률을 50% 이상으로 끌어올리려는 글로벌 프로젝트다. 외부에서 생산된 것을 들여와 소비하고 쓰레기를 배출하는 도시가 아니라 식량과 에너지, 생활물품 등 도시에 필요한 것들을 자체 생산하고 재활용을 통해 쓰레기를 줄이며 자급자족의 기술과 정보를 공유하는 전지구적 네트워크를 지향한다.

팹시티는 전세계 팹랩이 모이는 연례회의로 2014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팹10에서 처음 아이디어로 제안됐다. 이 자리에서 바르셀로나 시장은 향후 40년 안에 자급자족률 50% 이상을 달성하려는 바르셀로나의 계획을 소개하며 다른 도시들의 동참을 촉구했다. 이듬해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팹11에서 보스턴을 비롯해 중국 선전, 남아공의 에쿠룰레니 등 7개 도시가 프로젝트 합류를 선언한 데 이어 현재 전세계 16개 도시(지역, 국가 포함)이 참여하고 있다. 올해 중국 선전에서 열린 팹12에서 벨기에 브뤼셀, 브라질 쿠리치바, 영국 런던, 이탈리아 로마, 덴마크 코펜하겐도 내년부터 동참하겠다고 밝혀 참여 도시는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팹시티 프로젝트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니아고등건축연구소(IAAC)가 주도하고 있다. IAAC는 도시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접근법을 모색해온 교육기관으로 바르셀로나 팹랩을 운영하고, 전세계 팹랩의 교육 프로그램인 팹아카데미를 주관하고 있다.

도시 자급자족 실험실인 발다우라 랩의 그린팹랩. 3D프린터와 CNC 등 디지털 제조 장비를 갖추고 천연자원을 재료로 생활용품을 제작하는 공간이다. valldaura.net
도시 자급자족 실험실인 발다우라 랩의 그린팹랩. 3D프린터와 CNC 등 디지털 제조 장비를 갖추고 천연자원을 재료로 생활용품을 제작하는 공간이다. valldaura.net

팹시티의 구체적인 매뉴얼이나 평가 기준은 아직 없지만, 기본 전략은 백서로 나와 있다. 각 지역의 고유한 자원과 디지털 기술을 결합한 환경 친화적 첨단 제조 생태계, 태양열 등 재생에너지 기반의 분산형 에너지 생산, 블록체인 방식의 전자화폐를 이용한 지역 통화, 식량 자급을 위한 도시 영속농업, 만들기를 통한 배움을 중심에 둔 미래를 위한 교육, 정부와 시민 영역의 민관 협력 등이 그것이다. 핵심은 생산적이면서 지속 가능한 도시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다. 팹시티는 도시 문제 해결을 위한 지식과 경험을 도시들끼리 공유한다. 디지털 제조 실험실로서 거의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는 장비와 교육 프로그램을 갖춘 팹랩은 만드는 사람들의 창의력을 바탕으로 사회 혁신을 주도하는 플랫폼 역할을 맡는다.

바르셀로나와 암스테르담, 파리는 팹시티의 프로토타입 개발에 착수했다. 파리는 팹시티를 추진하는 민관 협력기구를 만들었고, 암스테르담은 팹시티 구현을 위한 건축과 디자인을 소개하는 전시로 올해 4월부터 두 달간 팹시티 캠퍼스를 운영했다. 바르셀로나 팹랩은 디지털제조와 식량, 에너지의 3개 분야에서 자급자족을 실험하는 발다우라랩을 가동하며 팹시티 건설을 위한 기술과 원칙을 개발 중이다.

아마존강의 이동형 팹랩 프로젝트

도시의 팹랩이 주도하는 팹시티 프로젝트와는 별도로, 남미에서는 아마존 원주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아마존 강에 팹랩을 띄우는 계획이 진행 중이다. 2013년 페루의 팹랩이 제안해서 남미의 여러 팹랩 등 20개국 50여 명의 전문가들이 협력하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기술과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소외된 채 가난과 범죄로 망가져가는 원주민 공동체를 재생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원주민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면서 아마존 지역의 자원을 활용해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을 만들고 교육을 하는 데 팹랩의 기술과 인력, 경험을 동원한다. 전기, 식량, 주택, 생활용품 등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생산하고, 원주민 스스로 관리하고 개발할 수 있도록 교육을 병행한다.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아마존 팹랩은 페루에서 브라질까지 아마존 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이동형 팹랩과, 오지까지 들어가서 활동할 수 있는 거점이 되도록 강 연안의 주요 지점에 정박하는 고정형 팹랩을 최소 10개씩 만들어 운영할 계획이다.

여기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크라우드펀딩이 올해 8월 시작됐다. 팹랩으로 쓸 선박도 생겼다. 페루 해군이 압수한 마약 밀거래 선박을 올해 5월 기증 받아 3D프린터와 CNC 등 디지털 제조 장비를 갖춘 팹랩으로 개조 중이다. 내년 초까지 개조를 마치고 우선 페루 아마존의 4개 지점에서 운항을 시작할 예정이다.

/그림 3 암스테르담의 수리카페. repaircafe.org

지구를 구하는 또다른 방법-수리하기

만드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권리 중 하나로 ‘자가수리(Self Repair) 선언’이 있다. 물건을 사서 쓰다가 망가지면 버리는 데 익숙한 소비주의를 거부하고, 고쳐 쓰자는 이 선언은 고칠 수 없으면 소유한 게 아니라는 말로 시작한다. ‘수리가 재활용보다 낫다’, ‘수리는 지구를 구한다’ ‘수리는 사람과 사물을 연결한다’ 등 이 선언을 구성하는 문장들은 생활 방식을 바꾸자는 제안이다.

2009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처음 생긴 수리카페는 직접 만들고 고치는 삶의 태도를 실천하는 공간이다.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카페이면서 각종 수리 도구를 갖추고 있다. 옷, 가구, 가전제품, 자전거, 장난감 등 망가진 건 무엇이든 갖고 오면 은퇴한 엔지니어나 솜씨 좋은 개인 등 자원봉사자들이 고쳐준다. 직접 수리할 수도 있다. 지역 주민들이 서로 얼굴을 익히고 생활 기술을 공유하면서 더불어 사는 재미를 나누는 곳이기도 하다.

수리카페는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을 모색하던 네덜란드 언론인 마르틴 포스트마가 시작했다. 암스테르담에 만든 첫 수리카페가 큰 호응을 얻어 이용자가 늘자 그는 수리카페 운영과 확산을 지원하기 위해 2011년 비영리 재단을 설립했다. 재단 홈페이지에 따르면 현재 전세계의 수리카페는 1,178개. 스위스 전역의 29개 수리카페는 올해 10월 29일 제 1회 ‘수리의 날’ 행사를 열어 쓰레기로 버려질 운명이던 물건을 800점 이상 되살렸다. 아시아에는 일본과 인도에 수리카페가 있다.

자급자족 도시에 도전하는 팹시티 프로젝트나 고쳐 쓰는 수리카페 운동은 한정된 자원을 계속 착취하는 지금의 생활 방식으로는 지구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위기 의식과 연관이 있다. 막연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피부에 와 닿는 절박한 현실이 되었을 때는 이미 늦을 것이다.

직접 만들고 고치는 것은 사물을 이해하고 좀 더 주체적으로 살기 위한 태도이기도 하다. 서울 연남동에 공동작업실을 두고 활동하는 디자이너 등 3명의 제작공동체 릴리쿰은 자신들의 만들기 경험과 철학을 정리해 최근 펴낸 책 <손의 모험>(코난북스 발행)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가 필요로 하고 의지하고 있는 것들을 스스로 생산할 능력이 있다면, 사회에서 낙오하거나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것은 곧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된다.” 릴리쿰은 “내 삶을 온전히 나의 삶으로 살아가기 위해” “만들기를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취해 환경과 일상을 복원하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개인의 삶을 주체적으로 재구성하려는 노력부터 전세계 만드는 사람들이 협력해서 지구를 구하려는 원대한 실험까지 메이커운동은 철학과 윤리를 공유하며 발전하고 있다. 메이커운동이 단순한 취미나 창업 경로를 넘어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근본적인 혁신의 동력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이 거기에 있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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