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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이름 빌린 성폭력 묵과 않겠다” 작가 서약 줄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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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짓고 만든 이들은 성차에 의해, 성 정체성에 의해, 나이에 의해, 사회적 지위에 의해, 신체적 조건에 의해 발생하는 명시적ㆍ암묵적 위계와 위계에 의한 폭력을 거부합니다. 이 책의 출간과 유통 과정에서 위에 해당하는 폭력의 사실이 추후 인지된다면 즉각 판매를 중단하고 독자분들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책임감 있는 대책을 강구하겠습니다.”
최근 서울 신촌의 시집전문서점 위트앤시니컬에서 열린 신해욱 시인의 낭독회에서 배포된 낭독시집 ‘귤 곰팡이 나이트’의 책 날개에 적힌 문구다. 책과 관련해 성폭력을 포함한 각종 폭력 사실이 밝혀질 경우 언제라도 판매를 중단하겠다는 선언이자 약속이다. 가해자의 범주도 시인뿐 아니라 출판ㆍ편집ㆍ유통에 참여한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 시집에 성폭력 방지 대책이 명시된 것은 처음이다.
이 대책은 최근 트위터에서 일부 시인들에 대한 성폭력 고발, 일명 ‘#문단_내_성폭력’ 사태가 확산되면서 이를 방지하기 위한 문인과 출판인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는 가운데 나왔다. 가해자로 지목된 시인들의 시집을 펴낸 출판사들이 관련 조약이 없어 출판관계 정리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한 것이다. 위트앤시니컬을 운영하는 유희경 시인은 “(귤 곰팡이 나이트는)한정판으로 제작된 시집이지만 이런 문구를 넣는 것만으로 일종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고 본다”며 “앞으로 서점에서 낭독시집을 내는 모든 시인들에게 문구 삽입을 제안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단 내 성폭력 방지를 위한 작가 모임 ‘페미라이터’는 최근 SNS를 통해 문학ㆍ출판계 성폭력 퇴출에 동참하는 ‘작가 서약’을 받기 시작했다. 서약에는 ‘젠더, 신체적 조건, 연령, 지위 등의 차이를 이용해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것, 지면과 발언권, 지위에서 비롯되는 권력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폭력에 동조하는 데 사용하지 않을 것, 폭력의 피해자들을 지지하며 함께 목소리를 낼 것’ 등이 포함돼 있다.
등단 문인뿐 아니라 “글 쓰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한 이 서약에는 이틀 만에 430여명이 참여했다. 소설가 권여선, 김이설, 정세랑, 천희란, 시인 김소연, 김선재, 김현, 백은선, 신해욱, 오은, 유진목, 이민하, 정영효, 문학평론가 양경언, 아동문학가 김지은, 계간 ‘미스테리아’ 편집장 김용언씨 등 수많은 문학ㆍ출판계 종사자와 지망생들이 서약에 참여하고 이를 인증했다.
페미라이터 측은 “문단 내 성폭력 고발이 활발하게 나온 10월 말경 문제의식을 가진 몇몇 문인들이 모여 관련 단체의 필요성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며 “문학ㆍ출판계 내 성폭력 사례를 접수하는 공식 창구나 그에 준하는 상담기구를 만들 계획도 갖고 있다”고 밝혔다. 페미라이터는 오는 30일까지 작가 서약을 받은 뒤 12월 1일 전체 명단을 홈페이지(femi-writers.net)에 공개할 예정이다. 이후 연구활동, 교육 프로그램, 낭독회 등을 통해 문학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각종 폭력에 맞설 계획이다.
이에 반해 성추문이 오르내리는 시인ㆍ작가들의 책을 낸 출판사들은 아직 구체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작가와 출판사가 법적 계약관계로 묶여있는 데다가, 사내에 성폭력 관련 내규가 없거나 빈약해 새로 만들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창비 관계자는 “작가와 편집자 간에 폭력이 발생할 경우엔 편집자가 내부인이라 관련 내규가 있는데, 외부에서 피해 사례가 폭로될 경우 어떤 조치를 취할지 모호한 게 사실”이라며 “그러나 최근 사태에서 출판사가 관련 주체 중 하나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며 사안의 경중에 따라 출고정지 등의 조치를 취하는 것을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논란이 된 시인들의 시집을 다수 출간한 문학과지성사도 재발 방지를 고심하고 있다. 일단 논란이 된 시인들의 시집을 출고 정지한 이 출판사 관계자는 성폭력 대책 마련에는“계약관계보다 내부 운영구조가 더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문지의 모든 저작물은 출판편집위원회의를 통해 나오는데 다양한 목소리가 있다 보니 한 발 내딛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편집위원과 편집자 전원이 폭력에 무감했던 것에 각성하는 분위기”라며 “문지의 운영구조 전반을 비판적으로 돌아보며 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말했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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