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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란 불꽃처럼 작아도 꺼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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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12일 토요일 저녁, 하늘에서 내려다본 사진 속의 광화문 거리는 촛불로 가득했다. 저마다의 곡선을 그리며 움직이는 무수한 작은 불꽃들은 거대한 강물처럼 유장하게 흘렀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촛불을 든 시민들의 분노는 유쾌하고 뜨거웠다. 어른과 아이, 청소년과 노인 할 것 없이 도심을 행진하며 정권의 퇴진을 요구했다. 함성과 웃음, 구호와 노래가 늦은 밤까지 서울의 복판을 가득 채웠다.
우리가 바라보는 이 사진들은 반드시 한 시대의 상징이 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 우리가 모두 죽고 사라진 후에도, 사람들은 이 사진들을 보면서 우리를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위기에 처한 2016년 말 한국의 공화정과 대의민주주의를 표상하는 이미지다.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거리에 나온, 속임 당한 주권자들의 모습이다. 이 사진들은 손으로 쓴 현수막을 들고 서로 어깨를 건 4ㆍ19의 학생들을 찍은 사진이나, 최루탄 연기 자욱한 거리를 달리는 1987년 6월의 시민들의 사진과 같은 계보에 자리할 것이다.
한국 현대사는 거대한 집회의 반복
거칠고 뜨거운 한국의 현대사에서 시민들의 분노가 결집되어 거대한 집회로 이어졌던 일이 적지는 않았다. 최근 십여 년만 되돌아봐도 2002의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 항의 집회,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2008년 한미 쇠고기 재협상 요구 집회, 2011년 반값 등록금 집회, 2013년 국정원 대선 개입 규탄 집회, 2014년 세월호 추모 집회 등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렇다면 그로 인해 세상은 얼마나 바뀌었는가. 매번 시민들은 열심히 분노했고, 거리에 나와 싸웠으며, 촛불을 든 채 오랜 시간을 견뎠다. 하지만 반값 등록금은 공염불에 불과했다. 국정원은 대선 개입을 인정하지 않았다. 세월호의 침몰 원인과 참사 당일의 진실을 요구하는 이들은 천막 안에서 외로운 투쟁을 이어나가야 했다.
심지어 판세가 뒤바뀌는 일도 있었다. 예를 들어 2004년 탄핵 역풍 위기를 맞은 한나라당은 박근혜 의원을 당 대표로 추대했다. 그는 당의 간판을 떼서 천막 당사로 옮겨 집무를 보는 결기를 보였고, 당시 한나라당을 기사회생시키는 괴력을 발휘했다. 거리에 나선 시민들이 애써 만들어낸 탄핵 반대 정국의 가장 큰 결실을 취한 이는 역설적이게도 박 대통령이었다. 무의미한 가정에 불과하겠지만 당시 그에게 ‘선거의 여왕’이 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거리에 나서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거대한 희망과 해방감으로 사회가 들끓어 오른 후에는 매번 차디찬 비관이 덮쳐왔다. 비관주의란 세상이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어떤 확신의 형태다. 아무리 거리에 나가서 목소리를 높여도 권력자들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거라고, 고작 촛불을 켜고 항의하는 일로 무엇을 바꿀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 왔고, 그러므로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주장한다.
낙관은 쉽지만 희망은 어려워
비관할 이유는 언제나 충분하다. 세상은 점점 차가운 민낯을 드러낸다. 지난주에는 입만 열면 인종주의와 성차별에 가득한 혐오 발언을 내뱉는 이가 세계 최강대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미국의 선거 결과가 다른 나라 사람들의 마음까지 유난히 착잡하게 하는 것은 트럼프가 미치광이거나 어리석어서가 아닐 것이다. 그의 당선은 동시대의 수많은 이들이 평등이나 정의라는 가치를 단지 조롱의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누설한다.
그렇다면 거리에 나와서 정의를 요구하고 분노하는 일은 누구의 마음과 공명할 수 있을까. 공감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1인 1표제의 대의민주주의만 지켜낸다면 어두운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은 지나치게 안이했던 것이 아닌가. 히틀러도, 박 대통령도 선거를 통해 통치권을 이양 받지 않았는가.
나아가 어떤 지식인들의 음산한 예언은 더욱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그들은 세계가 이미 파국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고,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할 뿐이라고 말한다. 불황과 전쟁, 파시즘과 폭력, 차별과 혐오의 세상이 도래하였다는 것을 학문적 사례와 모델을 바탕으로 꽤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도 한다.
이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힘은 이미 국가의 경계와 역량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군림한다. 사회 구성원은 부당한 통치자에게 위탁한 자신의 권력을 회수하고 교체할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지닌다. 최소한 당위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외부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훨씬 어렵다. 어쩌면 이는 수많은 이들의 촛불로도 어쩔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낙관은 쉽지만 희망은 어렵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낙관주의자란 지금 이곳에 있는 세계가 도달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라고 말했다. 만약 지금의 세계가 역사적으로 주어진 최선의 형태라면, 개인이 그것을 변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이것은 현재에 주어진 권력의 구조를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비관주의와 유사하게 작동하는 세계 인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희망이란 지금과는 다른 대안적인 세계가 가능하다고 믿고 행위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의한 권력을 교체하기 위해 행동하는 일,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나아가 우리가 겪어보지 못했던 세계를 쟁취할 수 있다고 믿고 움직이는 일이다. 따라서 희망은 더 나은 세계가 가능하다고 믿는 일종의 세계관이다.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중요
물론 이것은 왠지 모호하고 비현실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희망을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의 사회와 권력 구조에 순응하며 사는 것 이상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좋은 사회란 ‘자신이 속한 사회가 결코 현재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고 명쾌하게 정의한다. 새로운 것을 상상하고 요구하지 않는 이들에게 더 나은 세계가 하늘에서 떨어지듯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로부터 배웠다.
부당한 통치권자나 권력이 교체되는 일을 단순히 반복하면서 우리가 지금 이곳에 다다른 것은 아니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거나, 그것도 모든 이들에게 평등하게 있다거나 하는 인식의 변곡점을 지날 때마다 역사는 사회 구성원들의 막대한 상상력을 요구해 왔다.
그러므로 우리가 싸워야 하는 것은 통치권을 반납해야 하는 부당한 권력뿐 아니라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거나,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식의 냉소주의이기도 하다. 냉소주의는 권력의 구조를 영원한 것으로 가정하고, 개인은 그것을 변화시킬 수 없으니 복종하고 그 안에서 살 길을 도모해야 한다는 식의 사이비 현실 논리로 귀결된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우리가 거리에 나서는 순간 사회는 극적으로 변화한다. 즉 부조리한 권력이 있어도 아무도 저항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이는 사회에서, 부당한 권력에 대해 시민들이 분노하고 들끓어 오르며 항의하는 사회로. 권력자들에게나 시민에게나 두 사회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일본의 철학자 가라타니 고진은 설명한다. 설령 현실 정치의 장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얻어내지 못하더라도 촛불집회가 일어날 때마다 사회의 성격은 달라지는 것이다. 희망은 연약하고 모호하지만, 패배하지 않는다.
수십 년이 지난 뒤, 지금 우리가 지닌 희망의 흔적은 고작 몇 장의 사진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는 얼굴과 목소리가 사라진, 희미하게 반짝이는 작고 작은 점이 되어 사진에 기록될 것이다. 지금의 역사가 어떻게, 어디로 흘러가게 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희망을 비웃으며 딱딱하게 굳어지는 사회보다는, 더 나은 세계를 궁금해하고 요구하는 수많은 상상력이 존재하는 사회야말로 지금 우리가 살기 원하는 곳일 것이다.
김현호 사진비평가ㆍVOSTOK 매거진 편집동인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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