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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한 조사관행, 美 대선 예측 참사 불렀다

입력
2016.11.10 18:39

1948년 트루먼 예측 실패 이후

헛발 없던 美 여론조사 신화도 끝

영국 실패 사례 거울삼지 않고

심상찮던 전조 무시했던 결과

68년 만의 대실패이다. 1948년 트루만 대통령이 전 뉴욕주지사인 듀이를 상대로 펼친 역전 드라마를 예측하는 데 실패한 이후, 미국 여론조사는 대선 예측에서 실패한 적이 없었다. 미국 여론조사는 예측 실패를 거듭하는 우리나라 총선 여론조사와 잊을 만하면 사고치는 영국 여론조사와 격이 달랐다. 이 전설도 이제 끝이다.

당혹스런 실패를 진단하기 위한 분석들이 쏟아지고 있다. 일단 소도시와 농촌에 거주하는 중년 이상의 백인 남성들이 트럼프를 선호했다는 정황이 분명하다. 전통적인 민주당 강세지역으로 알려진 위스콘신, 펜실베이니아, 미시간에서 트럼프가 약진하면서 선전했다. 클린턴이 믿었던 유색인종의 지지도 과거 오바마 때보다 강력하지 않았다는 결과도 있다.

문제는 이런 정황을 미국 여론조사 전문가들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데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클린턴의 승리를 예측했다. 여론조사 자료를 무시하며 예측치를 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수십 년간 문제없이 작동했던 여론조사 방법론이 갑자기 고장난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럴까? 표집방법론, 자료분석법, 통계적 추정 등과 같은 과학적 연구방법론이 2012년까지는 문제없이 작동하다가 4년 만에 망가지는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일은 지나고 나야 밝게 보인다. 돌이켜 보면, 이번 미국 대선 여론조사가 뭔가 심상치 않다는 전조들이 분명 있었다.

첫째, 지난 봄 공화당과 민주당 예비선거 과정에서 주요 여론조사 기관은 트럼프와 샌더스의 승리를 자주 놓쳤다. 뉴욕타임스 ‘업샷’도 파이프서티에잇의 네이트 실버도 실수를 인정하며 반성을 겸한 분석기사를 냈다. 그러나 예비선거 여론조사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로 이런 국지적 실패는 이내 잊히고 말았다. 요컨대 미국 여론조사는 이번에 ‘반 기성세력’ 후보를 지지하는 유권자를 지속적으로 과소평가한 혐의가 있다. 

둘째, 선거 막바지에 지지율 격차감소를 기록했던 조사들이 선거 직전에 ‘떼짓기(herding)’하는 현상을 보였다. 지난 10월까지 10%포인트 가까이 트럼프를 앞서던 클린턴의 지지도는 10월 중순 경 급격하게 하락했다. 전문가들은 이 추세를 FBI의 클린턴 이메일 재수사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선거를 이틀 앞두고 FBI가 발표한 무혐의 소식과 함께 후보 간 격차가 더 이상 줄지 않는 사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런 극적인 추세 전환에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한데, 단 2개 조사기관을 제외한 모든 여론조사 회사들은 이를 간과했다.

일이 잘못되려면 귀신에 홀린 듯 흘러간다고 한다. 이번 여론조사에서 귀신 역할은 조사방법론이 아니라 무심한 조사관행이 담당했다고 본다. 여론조사 기관들이 관행과 타성에 젖어 중요한 여론변화의 전조를 포착하지 못했다. 도대체 ‘반 기성세력’ 후보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은 어디에 숨었다가 나왔을까? 왜 선거 직전 후보 지지율 격차 감소가 ‘신비스럽게’ 멈추었나? 여론조사 기관들은 이런 질문을 따로 던지고 답하지 않았다. 

모든 여론조사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예측 실패의 원인이 한 가지 있다. 이른바 ‘회피하는 보수주의자 효과’다. 이는 지난 1992년 영국총선에서 확인된 현상으로서, 유권자 일부가 정치적 수치심 때문에 여론조사를 기피하지만, 결국 이익을 좇아 투표에 참여하는 일을 뜻한다. 예컨대, 고학력 백인 남성이나 여성 유권자 가운데 차마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말할 수 없었던 유권자들이 평소에는 여론조사에 응하지 않다가, 선거 당일 투표소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여론조사 기관들은 이 효과를 영국 뉴스와 연구논문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그 현상이 지금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조사방법론을 가동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실패했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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