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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정권 ‘단골 돈줄’ 은행… 최순실 검은 손 비켜간 이유는

입력
2016.11.0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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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부 수시로 교체돼 비밀 폭로 가능성

박근혜 정부의 ‘비선실세’ 최순실씨가 깊숙이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는 미르ㆍK스포츠재단에는 모두 53개 기업이 774억원의 기부금을 낸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부분은 삼성(204억원), 현대자동차(128억원), SK(111억원), LG(78억원) 등 덩치 큰 대기업들의 주머니에서 나왔죠.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역대 정권마다 ‘단골 기부자’ 역할을 해 왔던 시중은행들은 명단에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자금규모로는 어느 대기업에도 뒤지지 않는 은행들에 어떻게 최순실의 ‘마수’가 비켜간 걸까요.

비교적 최근 사례들만 봐도 은행은 역대 정권마다 충실한 ‘돈줄’이었습니다. 정권 출범 직후부터 은행들에게 휴면예금 1,800억원 가량을 갹출 받아 미소금융재단을 세웠던 이명박 정부는 2012년 청년창업재단을 설립하면서 은행권에서 5,000억원을 출연 받기로 하고 최근까지 4,000억원을 모금했습니다. 박근혜 정부도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해 청년희망재단을 설립했는데, 박 대통령이 직접 제안해 1호 기부자가 된 청년희망펀드엔 은행원들이 기부자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입니다. 정권의 ‘캠페인성’ 정책엔 은행들이 어김없이 앞장을 선 셈입니다.

이랬던 은행들이 정작 ‘최순실 재단’은 피할 수 있었던 건 이들 재단과 은행 지배구조의 특수성이 결합된 결과라는 분석이 많습니다. 우선 의혹대로 재단이 최순실씨의 사익을 위한 것이었다면, 이들 재단은 설립과 운영 모두 가급적 은밀하게 추진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오너(주인) 없는’ 은행들은 애초부터 접촉 대상에서 제외됐을 거란 분석이 설득력을 얻습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같은 돈을 걷어도 주인 있는 대기업이 의사결정도 빠르고 비밀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은행은 은행장ㆍ임원 등 간부가 수시로 바뀌어 이들이 나중에라도 비밀을 폭로할 수 있는데다 금융당국의 상시 감독까지 받아 은밀한 자금을 내놓긴 힘들다는 겁니다.

실제 2002년 대선자금 파동 때도 여야 정당에 돈을 댄 곳은 수십개 계열사를 통해 비자금을 조성하고, 심복들을 내세워 끝까지 비밀을 유지할 수 있는 오너 있는 대기업들이었습니다.

두 재단에 돈을 낸 기업들의 총수 소환설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요즘 은행들은 주인 없는 회사인 걸 오히려 다행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한편에선 이런 비아냥도 적지 않습니다. “정경유착은 기업들도 얻는 게 있어 하는 것인데, 은행은 얻는 것도 없이 그저 돈만 내는 곳”이라구요. 은행이 최순실 마수에 얽히지 않은 것만 마냥 좋아할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대혁 기자 selecte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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