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내가 이러려고 음악했나”… 청와대 꾸짖은 ‘노래 함성’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블랙리스트’와 ‘최순실 게이트’로 짓밟힌 예술혼
“어~ 시국선언 들어간다.” 8일 오전 11시 서울 세종로 광화문광장에서 ‘굿판’이 벌어졌다. 붉은 색 옷을 입은 무속인이 하늘에 올리는 제사가 아니다. 마이크를 잡은 사내가 각설이처럼 “거리로 나온 음악인들은 블랙리스트에 들어갔네”라고 운을 떼자 주위에서 폭소가 터진다. 인디 음악인 한받이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로 지목되고 있는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씨의 ‘국정 농단’을 지켜 보며 만든 ‘돈만 아는 저질’이란 노래를 부르자 벌어진 풍경이다.
초겨울 바람이 매서운 광장에 나온 이들은 음악인들이다. ‘최순실 게이트’로 불거진 박 대통령의 실정과 문화계 블랙리스트 파문으로 억압당한 표현의 자유에 목소리를 내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한받의 ‘씻김굿’은 계속 됐다. 그는 “박근혜 정부 저질” “박근혜 끝내”라고 외치며 음악인들의 한을 달랬다. “우릴 거리로 내 몬 박근혜 정부를 향해 날립니다.” 그는 외침과 함께 허공을 향해 발차기를 여러 차례 날렸다.
음악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박 대통령은 법의 심판을 받아 민주공화국 부활에 기여하라”며 대통령 퇴진을 촉구했다. 가수 권진원과 말로, 밴드 시나위의 기타리스트 신대철, 브로콜리 너마저의 보컬 윤덕원, 래퍼 MC메타를 비롯해 작곡가인 원일 전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등 60여 명이 ‘민주공화국 부활을 위한 음악인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선언문엔 박 대통령 측근의 국정 농단 의혹에 대한 엄중한 수사와 예술인들 탄압에 대한 비판이 담겼다. 시국 선언 동참 성명에는 대중, 전통, 클래식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인 2,300여 명이 참여했다. 가수 강산에, 김C, 루시드폴, 10cm 멤버 권정열, 밴드 롤러코스터 출신 기타리스트 이상순과 가수 정태춘·박은옥 부부, 성악가 이재욱, 국악인 최용석 등이 뜻을 모았다. 음악인들의 시국 선언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음악인들은 2009년 700여 명이 참여한 이명박 정권 규탄 시국 선언을 내기도 했다.
“’헬조선’ 우울에 빠진 이유 알겠다” 역대 최대 시국선언
숫자가 말하듯 음악인들은 절망했고, 분노했다. 평소 정치와 사회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음악인들도 시국선언 현장에 여럿 눈에 띄었다. 시국선언을 마치고 한국일보와 만난 권진원은 “나이와 계층을 뛰어 넘어 많은 사람들이 ‘헬조선’이라고 부르며 우울에 빠진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됐다”며 “국민이자 음악인으로서 아이들과 후배들에게 불행한 나라를 물려 줄 수 없다고 생각해 나왔다”고 말했다. 윤덕원은 최씨의 국정 농단 의혹과 블랙리스트 파문을 언급하며 “도저히 있어선 안 될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 더 알리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상식 밖의 일을 바로 잡고 싶었다”고 거리로 나온 이유를 들려줬다.
음악인들은 “문화를 전혀 모르는 이들에게 철저하게 농락 당했다”고 화를 감추지 못했다. 최씨와 그의 측근 차은택 CF 감독이 나라의 뿌리인 문화 정책을 좌지우지하며 부린 전횡에 대한 분노다. 그간 민심에 귀 기울이지 못한 박 대통령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원일은 “예부터 소리를 듣지 않는 사람은 국민을 다스릴 수 없다고 했다. 국민의 소리를 개·돼지 소리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월호처럼 대한민국호도 침몰하고 있다”며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아이들이 떠나지 않았나. 이젠 더 이상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내가 이러려고 음악 했나”… 박 대통령에 ‘경종’ 울린 음악인
시국선언 행사는 ‘음악인다운’ 방식으로 진행됐다. 원일은 시국 선언에 앞서 종을 세 번 흔든 뒤 묵념을 했다. “박 대통령의 실정에 경종을 울리고, 세상의 소리를 들어라”는 취지다. 블랙리스트 인사를 자처한 가수 손병휘는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재1조 2항 문구를 활용한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 국악인 정민아는 가야금을 연주하며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 절망에 빠진 이들을 위로했다.
시국 선언 캐치프레이즈도 음악인들의 재치가 돋보였다. 광장에 모인 이들은 ‘블랙리스트 보단 신청곡 리스트’, ‘내가 이러려고 음악 했나, 자괴감 느낀다’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박 대통령 하야를 외쳤다. 국악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여학생이 ‘온 우주가 명령한다. 박근혜는 물러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국선언에 동참해 눈길을 끌었다.
시국선언의 마지막도 음악으로 끝났다. 모인 사람들은 ‘가객’ 김광석의 ‘나의 노래’를 합창했다. 블랙리스트로 짓밟힌 음악인들의 예술혼을 고취하고픈 바람이 통기타 선율을 타고 광장에 울려 퍼졌다.
“아무도 뵈지 않는 암흑 속에서 조금한 읊조림은 커다란 빛, 나의 노래는 나의 힘 나의 노래는 나의 삶~”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