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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정 “무대 오르면 행복한 최면... '40년 무명'도 자랑스럽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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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 최고의 연극 배우 명성
영화ㆍ드라마 진출 팔색조 연기
영화 ‘부산행’에서 뜨거운 우애로 관객을 울린 인길 할머니, ‘터널’에서 구조작업 중 발생한 사고로 아들(정석용)을 잃은 어머니, ‘비밀은 없다’에서 배후 정치를 하던 신선미 의원, ‘사냥’에서 엽사 무리에 쫓기던 양순(한예리)의 할머니, ‘죽여주는 여자’의 양공주 복희, ‘도둑들’에서 10인의 도둑이 노린 다이아몬드의 소유주 티파니, 그리고 KBS2 드라마 ‘공항 가는 길’의 주인공 서도우(이상윤)의 어머니인 인간문화재 고은희 여사까지.
나열한 인물들을 차례로 떠올리다 어떤 얼굴에서 순간 정지한 채 무릎을 친 이들이 꽤 많을 것이다. 주로 사건의 모티브가 되거나 변곡점을 만들어낸 인물들이라 작은 배역이어도 쉬이 잊히질 않는다. 배우 예수정(61)은 이 모든 인물을 그만의 결로 품어내며 짙은 잔상을 남겼다.
예수정은 스스로를 “40년 무명배우”라 일컫는다. 1979년 연극 ‘고독이라는 이름의 여인’으로 데뷔해 대학로 최고의 배우로 명성을 떨친 ‘연극계의 대모’인 그가 말이다. “큰 관심을 받지 못하는 일인데도 얼마나 좋아했으면 40년 가까이 해왔을까. 자랑할 만한 일 아닌가요. 40년 무명배우라는 건 저 자신을 칭찬하는 말이에요.”
예수정을 만난 지난달 31일 경기 성남시 서현동의 한 카페에선 ‘무명’이란 그의 말과 달리 반갑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미소로 화답하는 예수정의 얼굴에 포근한 가을햇살이 깃들었다.
대학생 때 ‘대부’ 보고 충격
탤런트 엄마 반대에도 연극 시작
-‘공항 가는 길’ 출연 이후 주변에서 많이들 알아보지 않나.
“얼마 전 외국 친구와 인사동에 갔는데, 지나가던 분이 내 손을 덥석 잡으며 ‘드라마에서 운명하셔서 너무 아쉬웠어요’라고 했다(웃음). 그 인물에는 실제 내 모습이 많이 섞여 있다. 헤어스타일도 이 모습 그대로이고, 분장도 전혀 하지 않았다.”
-작품마다 강렬한 느낌을 남기는 인물이라 쏟아 붓는 에너지가 많을 듯하다.
“정서적인 깊이가 필요한 장면을 앞두고 감정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마치 산고처럼 온 몸에 사르르 통증이 온다. 하지만 배우가 담당해야 할 기능적인 역할을 놓쳐버리면 불필요한 인물이 돼 버리니 몸이 망가지는 건 나중 문제다.”
-연극에서 영화와 드라마로 발을 넓힌 이유는 무엇인가.
“과거엔 남녀주인공에만 집중하는 평면적인 작품이 많았지만 요즘엔 이야기에 입체감이 생기고 부피감이 커져가는 것 같다. 카메라가 배경으로만 존재했던 인물들을 비추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삶의 태도들이 담기고 있다. 영화에 재미를 느꼈다. 함께 작업한 감독들에게서 받은 인상도 컸고.”
-최동훈 연상호 김성훈 감독 얘기인가.
“배우의 목소리에 귀를 열고 부피감을 키울 줄 아는 감독들이다. ‘도둑들’의 티파니 같은 경우 내가 너무 여리게 보이는 것 같아서 시가를 한 대 피우면 어떨까 하는 의견을 냈더니 최 감독이 당장에 시가를 구해왔다. ‘부산행’에선 애초 좀비들에게 쫓기다 허무하게 죽는 인물이었다. 연 감독에게 말했다. 노인이라고 해서 생각을 멈추는 것은 아니니 무언가 기능적인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1.5초만 더 달라고 했다. 죽음을 직감하고 젊은이들을 먼저 보내는 것으로 역할을 설정하게 됐다. ‘터널’에서도 아들의 빈소를 찾아온 정수(하정우)의 아내 세현(배두나)에게 달걀을 던지는 장면이 있는데, 내가 세현이 부의금을 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이런 돈 필요 없다’면서 내가 그 봉투를 세현에게 던지는 순간 사고의 대립이 발생하게 된다.”
“감정 집중할 땐 산고 온 듯 고통
깡패 같은 역할도 하고 싶어요”
예수정의 뿌리는 연극이다. ‘세일즈맨의 죽음’과 ‘하나코’ ‘나는 너다’ ‘과부들’ ‘바다와 양산’ ‘그린 벤치’ ‘신의 아그네스’ 등 숱한 무대에 올랐고, 서울연극제 연기상, 히서연극상, 동아연극상, 한국여성연극인상 등을 수상했다. 고려대에서 독문학 석사 학위까지 받은 뒤 독일 뮌헨대에서 연극학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지난해 2월까지 서울예대 연극과 교수로도 재직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선우엄마로 알려진 배우 김선영은 가장 존경하는 배우로 공연예술아카데미 스승이었던 예수정을 첫 손에 꼽는다.
이렇듯 삶의 모든 순간을 오롯이 연극에 바쳤지만 예수정은 “배우”라 불리기를 낯설어한다. 여기엔 어머니의 영향도 있다. 예수정의 어머니는 드라마 ‘전원일기’의 김 회장(최불암) 어머니 역으로 유명한 고 정애란이다.
-애초 배우를 꿈꾸지 않은 것으로 안다.
“어머니는 통이 크신 분이었다. 담배도 피우고 술도 잘 드셨다. 당시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우리 집에 드나들었다. 그런 어머니의 삶을 싫어했다. 배우에 대한 관심도 전혀 없었다. 어머니가 연극을 하면 이모가 어린 나를 보자기로 씌워 극장에 데려가곤 했는데, 당시 공연 시작을 알리던 종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어머니는 분장실에서 나에게 젖을 먹이다 순서가 되면 무대에 오르곤 하셨다. 그 기억들이 무의식 중에 나를 연극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게 했던 것 같다.”
-연극을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
“대학 1학년 때 영화 ‘대부’의 말론 브랜도를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곧장 주한독일문화원의 대학생 극회를 찾아갔다. 한번만이라도 저렇게 살아봤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다 독문학을 전공하면서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알게 됐다. ‘극장은 시민 계몽의 공간이다’라는 말에 가슴이 뛰었다.”
-어머니는 딸의 선택을 지지했는가.
“아주 심하게 반대하셨다. 대학 졸업 후엔 빨리 결혼하라고 재촉하셨다. 그래서 내 힘으로 돈을 벌면서 대학원 다니고 연극을 했다. 유덕형 연출, 장두이 선배 등과 작업하면서 ‘연극이 예술이구나’ 느꼈고 결국 독일로 유학을 갔다.”
-연극의 어떤 점에 매료된 건가.
“내 삶은 너무나 비루한데 연극 속 인물들은 저마다 확고한 삶을 산다. 무대에 오르는 동안에는 그들의 삶이 내 것인 듯 행복한 자기최면에 걸린다. 더구나 삶의 소중한 진실들을 관객들과 함께 나눌 수 있으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이 모든 인물들이 내 몸 곳곳에 다이아몬드처럼 박혀서 언젠가 내가 먼 곳으로 떠날 때 부력이 돼 줄 거라 믿는다.”
-아직 갈증을 느끼는 연기가 있는가.
“왼쪽 뺨을 맞으면 상대의 오른쪽 뺨을 후려치면서 자신을 주장하는 역할을 한번쯤 만나고 싶다. 검사든 깡패든 분명하게 자기 인생을 보여주는 인물을 연기하고 싶다. 잠깐 등장하지 않고 길게 나오면 더 좋겠다(웃음).”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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