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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냉면 원조는…” 호들갑에 가려진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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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넷 중 셋은 저마다의 냉면론 하나 품고 사는 시대다. ‘몽로’ 박찬일 주방장의 말처럼 “다양한 ‘냉면광 시대’의 언설”이 그야말로 어지러이 꽃핀 오늘이다. 그런데 ‘냉면광 시대’는 100년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냉면은 글로 쓴 ‘먹방’의 단골 출연자였다.
냉면을 둘러싼 대중의 정석-정통 다툼은 다른 한국 음식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 자체로 재미나면서도 막대한 음식 민속지이다. 하지만 100년을 지나도 떠오르지 않은 구석이 있다. 바로 음식의 물질문명과 음식의 구체적인 실제이다. 이는 한국 음식문화사 논의의 허약성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1920년대 대표적인 지식인 잡지이자 진보 성향이 강했던 ‘개벽’이 어쩌다 가벼운 이야기를 할 때 평양과 냉면은 만만한 소재였다. ‘개벽’ 1924년 제51호는 “15전에 산더미 같은 냉면 한 그릇”이 평양 사람들의 여름 피서와 맞먹는다고 했다. 은퇴한 평양 기생은 냉면집 사장님이 되었다. “냉면ㆍ소주”는 그때 이미 사계절에 다 있는 평양의 명물이었다.
평양냉면 호들갑 100년 전부터
검열과 탄압으로 1926년 ‘개벽’이 폐간되자 그 편집 인력과 제작사를 이어받아 또 다른 잡지 ‘별건곤’이 태어난다. ‘별건곤’은 대중잡지를 표방했다. 오늘날의 “종편 예능”과 다름없는 기획으로 식민지 조선인을 사로잡았다. ‘별건곤’의 먹방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1929년 ‘별건곤’24호는 “사시명물 평양냉면”을 내걸었다. 봄바람이 건듯 부는 봄은 대동강 푸른 물 따라 놀기 좋은 때이자 “가득 담은 한 그릇의 냉면”을 즐길 제철이란다. “능라도 버들 사이로 비추어 들어오는 달빛을 맞는” 가을은 냉면을 오랜 동무와 함께 먹기 좋은 제철이란다. “줄기줄기 긴-냉면을 물어 끊기 어”렵 듯 우정도 그렇단다. 그리고 여름. 이제 여름이 새로운 제철이다. 이 꼭지가 그린 여름 냉면은 이렇다. “대륙의 영향으로 여름날 열도가 상당히 높은 평야에서 더위가 몹시 달아오를 때 흰 벌떡대접에 주먹 같은 얼음덩이를 감추고 서리서리 얼킨 냉면! 얼음에 더위를 물리치고 겨자와 산미에 권태를 떨쳐버리리.”
글로 하는 먹방은 관념상의 제철, 겨울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함박눈이 더벅더벅 내릴 때 방안에는 바느질 하시며 ‘삼국지’를 들려주는 어머니 목소리만 고요히 고요히 울리고 있다. (중략)어머니 말소리가 차차 가늘게 들리어 올 때 “국수요-” 하는 큰 목소리와 함께 방문을 열고 들여놓는 것은 타래타래 지은 냉면이다. 꽁꽁 언 김치국을 두르고 살얼음이 뜬 진장김치국에다 한 저 두 저 풀어 먹고 우루루 떨려서 온돌방 아랫목으로 가는 맛!”
대중잡지를 표방한 만큼 여성미 품평은 ‘별건곤’의 중요 기획 가운데 하나였고, 기생과 카페 걸과 여성 연예인과 명사들의 풍문과 추문 또한 공들인 기사였다. 범죄와 매춘, 마약과 유흥가 탐사도 빠지지 않았다. 할리우드 소식도 촘촘했다. 초콜릿을 음미하거나 커피 한 잔 하는 여성을 깎아 내린 이런저런 촌평은 ‘된장녀’론의 조상이라고 할 만하다.
‘별건곤’은 고급스러운 먹방도 품었다. 위의 냉면 이야기에 앞서 발행된 ‘별건곤’ 1928년 제12・13호는 대중이 선망한 유학생을 불러냈다. 유학생에게 “외국 가서 생각나던 조선 것”을 물었고, 유학생은 “조선의 달빛”에다 “갈비” “냉면”이라 화답했다. “동지섣달 추운 날에 백설이 펄펄 흩날릴 때 온돌에다 불을 뜨뜻히 때고 3~4 우인(友人)이 서로 앉아 갈비 구워 먹는 것이라든지 냉면 추렴을 하는 것도 퍽 그리웠다.”
냉면 사시사철 음식 만든 냉장고
해방 전 신문, 잡지, 영화, 문학, 기타 자료 속에서, 냉면 이야기는 밑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 1941년 개봉한 영화 ‘아름다운 청춘’을 보자. 등장인물은 손님을 맞아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청한다. “주인아주머니, 냉면 세 그릇만 시켜주세요!” 하숙생의 만만한 배달 음식이 냉면이다. 냉면을 품은 호들갑과 냉면이 있는 풍경은 다양한 경로로 오늘에 전해졌다. 오늘날에는 달걀 먹는 시점, 초와 겨자를 치니 마니 다툼, 순메밀면만 옳다는 주장, 고기국물과 동치미를 둘러싼 정통론에 남의 집안 내력을 뒤져 그린 계보도까지 등장했다.
냉면은 “차갑다”는 감각을 제 것으로 한 음식이다. 식었다도 아니고, 상온에 견주어 시원한 정도보다도 더 찬 음식이다. 이는 상온과의 관계에서 상대적인 것이다. 한반도는 봄ㆍ가을과 여름, 겨울의 상온이 전혀 다른 곳이다. 냉면의 차가움은 “상온에 견주어 어떠한” 감각이다. 전통적으로는 상온 빼고는 다른 맥락이 없었다.
감각 전환의 계기는 냉장-냉동 기술의 발명에서 왔다. 1862년 비전기식 냉장고가 등장한다. 1870년대는 대량 생산한 얼음과 해운업이 본격적으로 손을 잡는다. 기술은 급물살을 타 1880년대에는 얼음의 대량 생산이 전세계로 퍼졌다. 1890년대에는 조선에도 제빙 및 얼음 저장업체가 설립되어 얼음을 이용한 수산물 보관과 유통이 시작된다. 1910년대에는 현대식 냉장고가 본격적으로 보급된다. 드디어 냉면은 인류사에 없던 상온의 감각 아래 “사시명물”로 접어들 기반을 마련했다.
계절감은 의외로 까다로운 문제다. 메밀은 대개 10월 말부터 11월 중순 사이에 수확한다. 제분은 까다롭다. 농번기에 제분이라니. 당연히 메밀가루는 가을 이후 농한기에나 만질 재료다. 냉동-냉장 기술이 없던 시대에는, 왕의 빙고를 제외하고는 여름에 찬물에 식히는 방법 말고 찬 음식을 해 먹을 방법이 전혀 없다. 식은 정도가 아니라 차가운 국물이라면, 고기에서 온 육수 국물이든 동치미든 뭐든, 결국 겨울이나 되어야 손에 쥘 수 있다. 면의 재료도 국물 재료도 다 겨울에 한해 존재했다. 그러다 최근 100년, 앞서 본 대로 겨울을 넘어섰다.
습기까지 가득한 한여름, 그야말로 벌떡대접에 받은 육수를 벌떡벌떡 넘기며 느끼는 청량감과 상쾌함은 왜 냉면의 제 맛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고 가을 무와 배추에서 온, 쩡한 김치국물에 막 수확한 메밀로 만든 면을 더한 냉면이 어디 제 맛에서 빠지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평양냉면을 모른다
“눌러 먹고 사는 사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여름의 냉면집이다. 평안도 같은 데는 여름보다 겨울 냉면을 더 맛이 잇고 운치 있는 것으로 알지만 서울에서는 여름철에 냉면을 많이 먹는다. 아니 평안도에서도 실제 많이 먹기는 여름이다. (중략)여름철에 눌러 먹고 사는 사람이야 냉면집밖에 또 무엇이 있으랴. 서울에도 지금은 냉면집이 해마다 늘어간다. (중략)솜씨를 따라서 맛이 각각이다. 연조로나 깨끗하기로는 종로 평양루가 몇째 아니 가지만 순평양식으로 닭고기 많고 국물 맛 좋기로는 무교정 진평옥이 제일일 것이다.”
‘별건곤’ 1931년 제41호에 실린 기사 한 꼭지이다. 이제 여름은 빙수집은 얼음 갈아 먹고 살고, 아이스크림집은 아이스크림통을 저어 먹고 살고, 냉면집은 냉면 눌러 먹고 사는 시대가 됐다. 1930년대 평양 사람들도 여름에 냉면을 더 찾는다. 기술이 여름 풍경을 완전히 바꾸었다. 순평양식에 닭고기가 오른다. 요즘 상상하는 “원래 냉면”하고도 또 다르다.
“눌러 먹고 살다.” 이 때는 기계식 국수틀이다. 기계식 국수틀은 냉면 대중화의 또 다른 조건이었다. 여기에 1885년 이후 1914년까지 200배나 수입이 급증한 설탕, 그리고 1910년 조선에서 판매를 시작해 냉면과 손잡은 첫 MSG인 아지노모토까지 끼어들어 전에 없던 환경을 만들었다. 음식의 조건, 미각의 맥락이 완전히 바뀌었다.
우리는 “고향” “전통” “정통” “진짜” 같은 어휘를 맴돌며 냉면을 먹어왔다. 그러는 사이 음식이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엄중한 물리적 실제라는 점을 자주 놓쳤다. 냉면 재료의 공급, 냉장고, 기계식 국수틀, 설탕과 아지노모토, 주방 안팎의 음식 노동에 대해 우리는 아직 잘 모른다.
다시 한 번, 여기가 급소다. 시공간적 제약에서 오는 문명과 물질을 빼먹으면 각자의 기호와 선호에 관한 얘기들만 무성하게 자라날 뿐이다. 이는 음식 문화사에서 여러 거짓말을 조장할 수 있는 빌미가 될 수 있다. 평양냉면을 둘러싼 여러 얘기들은 재미있는 놀이임에는 분명하다. 그 재미있는 놀이만으로는 비는 구석이 생긴다. 냉정히 돌아볼 때도 됐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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