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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제기의 시네마니아] '죽여주는 감독'의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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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영화 만들 때부터 유명 인사였다. 또래 영화학도들에게조차 ‘감독님’ 호칭을 들었다. 한국영화를 이끌어 갈 재목으로 종종 꼽혔다. 그럴 만도 했다. 변혁 감독과 공동 연출한 ‘호모비디오쿠스’(1991)가 ‘단편 영화의 칸’이라 불리는 프랑스 클레르몽페랑 단편영화제에서 1992년 심사위원특별상과 예술공로상을 수상하며 스타 감독이 됐다. 유명 영화제 수상이라곤 배우 강수연 정도였던 시절이니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장편영화 감독이 된 이후에도 비단길을 걸었다. 이미숙 이정재가 주연한 데뷔작 ‘정사’(1998)는 흥행과 함께 호평을 끌어냈다. ‘순애보’(2000)와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2003)를 연출하며 화제를 뿌렸다. 동명 웹툰을 스크린에 옮긴 뮤지컬영화 ‘다세포소녀’(2006)는 흥행 쓴 잔을 마셔야 했지만 도전 정신이 빛났다. 만화의 상상력을 영화에서도 발휘하겠다는 생각에 이감독이라는 새 이름으로 메가폰을 잡았다. ‘여배우들’(2009)과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2012)는 상업영화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실험정신을 최대한 투영한 작품이었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극적 구성을 시도한 영화들이었다.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두근두근 내 인생’(2014)에선 강동원과 송혜교를 철없는 젊은 부모로 만들었다. 참신한 소재를 세련된 연출로 다뤄 온 감독의 명성이 두 청춘 스타를 캐스팅하는 데 적지 않게 작용했다.
이재용 감독은 충무로에서 자기만의 영역을 확보한 영화인이다. 흥행이 제일 가치로 여겨지는 영화판에서 그는 일종의 돌연변이다. 대형 흥행작이 없는데도 큰 별들과 함께 작품들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물량 공세까진 아니어도 그의 영화는 빛깔 좋은 상업영화의 테를 유지해왔다. 그의 신작 ‘죽여주는 여자’가 당혹스러우면서도 흥미로운 이유다.
‘죽여주는 여자’는 저예산 독립영화의 외피를 지녔다. 순제작비는 13억원. 등장인물들의 면면과 소재, 주제도 이 감독의 전작들과는 딴판이다. 늙어서까지 몸을 팔아야 하는 60대 여성 소영(윤여정)의 고단한 삶을 렌즈 삼아 가족으로부터 소외된 노인과 트랜스젠더, 장애인, 이주노동자 등의 삶을 들여다 본다. 노인 성매매와 자살 조력이라는 자극적인 이야깃거리를 지렛대 삼아 상업영화가 외면해 온 한국사회의 어두운 면을 들춰낸다. 약자들끼리 서로를 보듬으며 삶을 이어가는 모습이 마음을 울린다. 스타를 앞세우고, 연예계의 이면 또는 조선 양반들의 삶이나 조명해 온 것으로 오해받을 만한 감독의 작품으로선 대단한 반전이다. 굳이 이전 작품들과 공통점을 찾자면 성이 주요 소재이고 새롭다는 점 아닐까. 획일화로 치닫는 한국영화의 최근 흐름을 감안하면 그의 변화가 반갑다. 오래도록 영화팬들에게 ‘죽여주는 남자’였던 이 감독의 다음 변신이 기다려진다.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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