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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성 칼럼] 안 움직인 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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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문제 지렛대 희망한 송민순 회고록
北인권 대응 과정 내통으로 모는 건 잘못
취지 살려 냉전체제 극복 토대로 삼아야
목하 뜨거운 논쟁을 유발 중인 송민순 전 외교부장관의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는 1976년 8월 18일 발생한 판문점 도끼사건으로 시작한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 무성하게 자라 경계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 가지 치기에 나선 미군 장교 2명을 북한 경비병이 작업 도끼를 빼앗아 무참히 살해한 사건이다.
미국은 즉각 휴전 후 처음으로 전쟁준비 태세 데프콘2를 발령하고, 미드웨이 항모전단, F-111 전폭기 20대, 핵 탑재가 가능한 B-52 폭격기 3대 등 막강한 화력을 한반도에 배치했다. 전면전 일보직전 상황이었다. 그때 2년 차 외교관이던 송민순은 휴전체제를 담당하는 외교부 북미2과 사무관으로 근무하며 이 사건 수습과정을 지켜보았다. 분단국 초임 외교관 송민순이 한반도를 짓누른 냉전과 분단체제에 문제의식을 갖게 된 계기였다.
북핵 6자회담 한국 수석대표로 9ㆍ19공동성명 도출을 주도했던 송 전 장관은 회고록 머리말에서 “나의 기억은 8ㆍ18 도끼만행 사건에서 9ㆍ19 공동서명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에 걸쳐 전개된 ‘한반도 분단과 북한 핵’이라는 줄기에 매달려 있다”고 밝혔다. 그가 현역으로 활동했던 기간에 9ㆍ19 공동성명 외에도 한반도문제 해결을 위한 크고 작은 합의가 있었지만 번번이 북핵이라는 장애물에 걸려 좌절되었다. 송 전 장관은 표면에 드러난 핵 문제 밑에 냉전의 잔재가 거대한 빙하처럼 도사리고 있음을 원인으로 지적한다.
9ㆍ19 공동성명은 이 빙하를 움직이는 작업의 이정표이자 설계라는 게 송 전 장관의 평가다. 그리고 “긴 여정을 거쳐 나는 한반도 문제 해결의 지렛대는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하나로 묶는 것이라는 결론에 다시 도달했다”고 말한다. 그는 미ㆍ중 패권경쟁 심화와 최악의 남북관계 속에서 그 지렛대 확보에 다시 도전하는 작은 토대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이 회고록을 집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회고록은 발간되자마자 엉뚱하게 냉전적 사고와 여야ㆍ진영 간 대결을 부추기는 불쏘시개가 되고 있다. 2007년 11월 노무현정부의 유엔 인권위원회 북한인권결의안 기권 결정 과정이 문제가 됐다. 당시 김만복 국정원장의 제안으로 북한의 의사를 확인한 뒤 북한의 반발이 거세자 기권결정을 내린 것으로 기술된 부분이다. 그 중심에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던 문재인 더민주 전 대표가 있었으니 미르ㆍK스포츠재단 의혹으로 수세에 몰린 새누리당으로서는 최고의 호재를 만났다.
유엔 등 국제다자무대에서 북한 인권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할지 비켜갈지는 김대중ㆍ노무현정부에서 오랜 숙제였다. 북한 인권문제는 북한 체제문제와 직결돼 있어 인권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는 순간 북 체제를 부정하는 꼴이 된다. 국제사회 여론을 의식해야 하는 외교부와는 달리 남북관계를 우선시하는 통일부가 인권거론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남북관계를 중시한 김대중정부에 이어 노무현정부도 처음에는 통일부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2006년 10월 북핵 실험을 계기로 노무현정부는 유엔인권위의 북한 인권결의안 찬성으로 돌아섰다. 그 과정을 청와대 안보실장이던 송 전 장관이 주도했다. 그런데 2007년 10월 제2차 남북정상회담 후에는 상황이 또 달라졌다. 격렬한 토론 끝에 다시 기권으로 결론이 났다. 이를 꼭 부정적으로 볼 이유는 없다. 인권문제에 유연하게 대응해 북한 정권을 개혁으로 이끌어 내면 그게 북한주민의 실질적 인권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북한의 의사를 확인해 본 뒤 기각 결정을 했다는 부분이다. 송 전 장관은 자신이 인권 결의안 찬성에 대한 북한 반발을 너무 우려 말라며 뉴욕 무대에서 우리 외교관들의 북측 설득 노력을 소개하자 그러면 북한의 의견을 직접 확인해 보자는 제안이 나왔다고 회고록에 썼다. 북측 반응은 뻔해 보였지만 그런 제안 배경을 “내통”이라고 몰아가는 것은 무리다. 그럼에도 냉전적 사고로 상황을 비틀고 색깔론 공세를 펴는 세력이 있다. 아직도 한반도를 짓누르고 있는 냉전 잔재의 빙하가 전혀 안 움직였다는 뜻이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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