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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재단 추문에 100년 전 명월관이 떠오르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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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국정감사의 뜨거운 쟁점 가운데 하나는 재단법인 미르다. 16개 대기업 집단에 속한 30개 기업이 두 달 만에 486억원의 기금을 출연한 사실도 놀랍고, 기업자산순위에 따라 1등부터 30등까지 줄을 세운 출연 액수도 얄궂다. 청와대 개입 의혹은 일파만파다. 자발적인 참여라는 전경련의 강변을 믿는 사람은 없다. 검찰도 수사에 나섰다. “한식 세계화”는 이번에도 추문과 의혹의 한구석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는 한가할 뿐이다. 지난달 29일 열린 한국농어촌공사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국정감사에서 윤숙자 현 한식재단 이사장은 재단법인 미르 관련 의혹에 대해 “미르재단이 한식 문화를 알린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논쟁이 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라고 했다. 의혹과 쟁점이 어떻게 됐든, 내 일만 굴러가면 그만이라는 태도다. 좋은 게 좋다는 생각에 갇힌 말이다.
일관성은 있다. 한식재단의 전 사무총장은 지난해 한 인터뷰에서 ‘사업에는 외풍이 있게 마련’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어 “그 분(이명박 대통령의 부인 김윤옥 여사)도 계셨고 훌륭한 분들이 많이 계셨어요. (중략)그 때는 굉장히 부각이 많이 됐었고요”라며 특정인을 두둔했다. 비난은 어디서 왔는가. 끝내 모르쇠다.
잡음 끊이지 않는 한식 세계화
“한식 세계화”는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의 “한식을 2017년까지 세계 5대 음식으로 육성”하겠다는 선언으로 본격화했다. 김윤옥 여사는 ‘한식세계화추진단’ 명예회장에 올라 직접 일을 챙기기 시작했다. 추진단의 뒤를 이은 한식재단은 홍보를 앞세워 효과가 의심되는 일을 벌였다. 새누리당 김재원 의원실과 협성대 이후천 교수에 따르면 2011년 11월부터 2012년 1월 사이 한식재단은 런던, 파리, 브뤼셀, 마드리드 등지에서 호화판 잔치를 열었다. 1인당 소요 비용은 런던 449만원, 파리 474만원, 브뤼셀 238만원, 마드리드에서 270만원에 이르렀다. 2011년의 경우 결식아동 지원금을 전액 삭감해 만든 돈이 이리로 들어왔다. 2009~2012년에 집행된 총 사업비 931억 가운데, 한식재단이 쓴 돈이 298억이다.
그러나 사업에 대한 좋은 평가는 없다. 측근이 이권을 챙긴다는 등의 추문과 사업 부실에 대한 비난만 미어졌다. 2010년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회 ‘국정감사 결과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농수산물 유통공사와 한식재단을 통한 한식 세계화는 역량 부족으로 한계가 있”으며, “예산이 낭비되는 사례가 있으므로 (중략)예산이 낭비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을 적시했다. 이명박정부가 박근혜정부로 바뀐 2012년 국회예산정책처는 “농림수산식품부는 ‘한식세계화’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서 실제적인 성과와 무관한 과도한 전시성-홍보성 예산 남용을 방지할 수 있는 방안을 수립한 후 집행하여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 경과에 눈감은 변명은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오래 전에 제기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구태와 거기 얽힌 인사를 청산하지 못했기에 “한식 세계화”도, 선의와 능력이 있는 인력도 지리멸렬인 것이다. 구체적인 적폐는 모른 체하고, 좋은 게 좋다는 안일한 인식에, 일을 하다 보면 잡음도 있게 마련이라는 무책임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까.
100년 전의 어떤 음식 전문가
이쯤에서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1903년 조선음식점 명월관(明月館ㆍ개관 당시에는 명월루)을 연 100년 전의 음식-한식 전문가 안순환(安淳煥ㆍ1871~1942)이다. 안순환은 1898년 관리 생활을 시작해 1909년 임금의 음식과 왕실의 연회를 담당하는 벼슬인 전선사(典膳司) 장선(掌膳)에 올랐다.
그는 꽤 눈치 빠르고 바지런한 사람이었다. 출신은 보잘 것 없었지만 왕실의 주요 인물과 고위 관료들과 곧잘 어울리게 되었다. 왕실 인사와 고위 관료의 눈에 드는 데에는 그의 요리 감각과 연회 기획 능력이 단단히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지난 활동에 대해 이런 회고를 남긴 바 있다.
“(왕실 음식도 차림새나 위생에 문제가 많았는데)그러든 것을 내가 궁내부에 전선과장으로 있을 때 개량했지요. 그 때문에 역적이란 말까지도 들었습니다만. 그렇게 궁내부에서부터 개량을 해 고임도 얕게 하고 속에 나쁜 것을 넣지 않으니까 일반 민간에서도 (자신의 음식 연출 방식을)따라가더군요.”(‘별건곤’ 1930년 1월호)
“아무리 영양이 충분한 음식이라도 요리 방법이 틀리면 맛이 없을 것이오 영양분이 있고 만들기를 잘했다 해도, 그 음식의 고임새를 잘못하면 보기에 실을 것입니다. (중략)나는 구한국시대에 다년간 궁내부 전선과에 있었을 뿐 아니라, 이래 수십 년 동안을 요리업에 종사해 실제로 조선의 음식은 다 만들어도 보고 연구도 하며 또 일본에 가서 궁내성에서 요리 만드는 것도 시찰하고 그 외에 중국 요리, 서양 요리도 대개는 내 손으로 만들어도 보고 먹어도 보고 또 연구도 하여 보았습니다.”(‘별건곤’ 1928년 5월호)
오늘날의 눈으로 보더라도 손색없는 감각과 자기 수련의 자세다. 그런데 안순환은 세상을 모르는, 다만 내 일이 세계의 전부인 전문가였다. 전세계 문물이 가장 먼저 들어오는 왕실에서, 온갖 음식과 연회를 접하고, 그 자신이 요리의 실제, 상차림 연출의 실제에서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경험을 쌓은 이 관리가 자신의 개인 음식점 사장이 됐을 당시 서울 시내 소공동 일대에는 청요릿집이, 충무로-명동 쪽에는 일본요릿집이 성업 중이었다.
나라가 망해가는 가운데, 부일배와 어지러운 시대의 벼락부자(실업계라고 점잖게들 불렀지만)와 고위 관료의 회식과 접대 수요가 폭발하던 때였다. 바로 그때, 나라 망하기 전 종3품까지 오른 관리가 요릿집 사장을 겸직한 것이다.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음미할 만한 문헌이 있다. 1908년 ‘황성신문’ 1월 10일자에는 ‘명월관 확장 광고’가 실렸다. 광고의 도입부가 이렇다.
“삼가 생각하매 북두칠성의 손잡이가 동쪽을 향하면 천하가 봄이 되는데, 사회의 대운은 갈수록 창성하고 있습니다. 우리 명월관이 이를 축복해 영업을 위한 시설을 확장해 열심히 영업하고 있습니다.”
그의 세상은 “사회의 대운이 창성”한 즐거운 봄날이었다. 도입부에 이어진 명월관의 호화로운 “메뉴”에는 위스키, 브랜드, 샴페인, 마사무네 외 일본주 일체, 각종 맥주에다 조선과 일본과 서양 음식을 망라하고 있다. 루손과 이집트산 권련은 덤이다. 안순환은 1918년에는 이완용의 집을 사들여 태화관을 개업하기도 했다. 1930년대 안순환의 별명은 “조선 요리계의 왕자”였다.
안순환처럼 놀림감 될 것인가
안순환은 제 이익이 될 데라면 어디든 껴들었다. 1909년 통감부 문서에 따르면 정부는 안순환을 일진회 회원으로 파악하고 있었고, 파면을 시도했다. 그러나 안순환의 뒷배는 든든했다. 파면 논의는 유야무야됐다. 그의 관운은 나라 망하고도 이어졌다. 안순환은 1911년에는 망한 왕실의 살림을 챙기는 일본제국 궁내성 아래 직제인 이왕직의 사무관에 올랐다.
1918년 거물 부일배 윤치호는 조선총독의 정치참모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 경성일보 사장을 접대하기 위해 안순환의 별장을 빌리기도 했다. 말 타면 견마잡히고 싶다던가. 1935년 안순환은 도쿄에서 열린 동양유도대회에 조선 유림 대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3년 공자의 고향 중국 곡부에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문서를 보냈을 때에는 곡부의 인사로부터 “나라 망한 줄을 아직도 모른다”는 야유를 받았을 뿐이다.
오늘은 21세이고, 우리는 공화국의 시민이다. 그런데 나는 오늘의 몇몇 한식ㆍ음식 전문가의 모습에서 100년 전 안순환의 좌충우돌을 다시금 떠올리고 있다. “한식 세계화” 때문에, 한국인 사이에서, 한식에 종사하는 분들이 혹시 놀림감이나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이른바 한식과 세계화 전문가들이 이 걱정에 함께 이르기란 정녕 힘들까.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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