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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기술로 지속 가능한 사회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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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명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방식이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대로 “지구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게 제공하지만 모든 사람의 탐욕까지 채워주지는 않는다.” 한정된 자원을 착취하고 환경을 파괴하며 이룩한 성장이 인류의 공멸을 부를지 모른다는 우려는 기후변화에 따른 재앙을 목도하는 오늘날 더 이상 쓸데 없는 걱정일 수 없다.
‘지속가능성’이라는 긴급한 요청에 대응하는 움직임에 적정기술이 있다. 적정기술은 지역공동체의 문화·정치·환경적인 면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기술을 말한다. 적정기술 운동은 1970년대 시작됐다. 영국 경제학자 슈마허가 1973년 출간한 책 ‘작은 것이 아름답다’(부제 ‘인간 중심의 경제를 위하여’)에서 제시한 ‘중간기술’이라는 개념으로 출발했다. 초기에는 가난한 나라에 적합한 소규모의 저렴하고 단순한 기술로 통했지만, 지금은 부유한 나라에서도 빈곤이나 장애 등으로 기술에서 소외된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장됐다. 보다 인간 중심적인 기술이자 대중에 의한 생산기술로서 적정기술은 단순히 기술의 한 형태라기보다 윤리적 삶의 방식이자 가치관으로서 더욱 의미가 있다.
필요한 것을 직접 만들고 공유하는 흐름인 메이커운동은 적정기술과 맥이 통한다. 지속가능성, 중앙집중이 아닌 분산, 기술의 민주화, 개방과 협력 등 추구하는 가치가 겹친다. 메이커들은 보통 재미로 취미 삼아 만들기를 시작하지만, 깊이 빠져들수록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싶어한다. 적정기술로 뭔가 만드는 것도 그 중 하나다.
서울 불광동의 서울혁신파크 19동 2층에는 적정기술랩이 자리잡고 있다. 아래 층의 서울이노베이션팹랩이 3D프린터 등 디지털 장비 중심의 제작 공간인 데 비해 적정기술랩은 좀더 아날로그적이다. 서울적정기술협의회 소속 11개 단체가 입주한 사무실이자 그 중 세 단체, 마을기술센터 핸즈와 적정기술공방, 대안에너지기술연구소가 운영하는 메이커 스페이스이기도 하다.
20일 여기서 햇빛저금통 만들기 워크숍이 열렸다. 햇빛저금통은 햇빛을 충전해서 조명으로 쓸수 있는 간단한 장치다. 작은 플라스틱 반찬통에 태양전지판, 충전지, LED와 전자회로를 붙여서 만들었다. 귀촌을 준비하는 사람, 대안학교 교사 등 8명의 참가자들은 납땜을 해서 완성한 저금통에 반짝 불이 켜지자 탄성을 질렀다. 매우 소박한 도구지만 내 손으로 직접 만든 기쁨이 컸다.
이 워크숍을 진행한 마을기술센터 핸즈의 정해원 대표는 “완제품을 사서 써도 되겠지만, 직접 만들어보면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다”며 “기술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갖고 접근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적정기술과 메이커운동이 공유하는 태도는 저항 정신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직접 만들고 고쳐보는 경험은 주어진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동적 소비가 아니라 능동적 활동이라는 점에서 물건과 나, 기술과 나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젊은 발명가 마친 자쿠보우스키는 미주리주 시골에서 오픈소스 적정기술로 자급자족 공동체 실험을 하고 있다. 프린스턴대에서 핵융합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자신이 받은 교육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에 농부로 변신했다. 그가 만든 비영리재단 ‘오픈소스 이콜로지’는 ‘지구촌 건설 세트’를 만들고 있다. 트랙터, 오븐, 발전기, 자동차, 3D프린터, 벽돌 찍는 기계 등 현대적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상 도구 50종을 오픈소스 적정기술로 직접 만들어 쓰자는 거다. 농부와 엔지니어가 협력해서 진행 중인 이 프로젝트는 이미 10여 종의 시제품을 제작했다. 싸고 튼튼하면서 전문가가 아니어도 누구나 직접 만들 수 있는 도구가 목표다. 크라우드 펀딩과 후원자들의 기부금으로 개발비를 마련해 제품을 생산하고 만드는 방법과 설계도는 누구나 따라할 수 있게 공개해 인터넷에 공유하고 있다. 제품 값은 기존 제품의 평균 8분의 1밖에 안 된다.
적정기술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손쉽게 유지하고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현지 주민들이 기술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단순 사용자에 그치면 지속될 수 없다. 개도국을 위한 적정기술로 개발된 제품 중에는 설치나 보급 후 유지 관리가 잘 안 돼 방치된 예가 꽤 있다.
메이커들이 애용하는 디지털 제작도구 중 하나인 3D프린터는 적정기술의 확산에 큰 도움이 되곤 한다. 3D프린터와 컴퓨터 등 디지털 장비를 갖춘 메이커 스페이스가 있고 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교육이 이뤄진다면 현지화가 가능하다. 아프리카에 등장하고 있는 메이커 스페이스에서 실제 사례를 볼 수 있다.
서부 아프리카 토고의 수도 로메에 2012년 문을 연 우랩(Woe Lab)은 토고 최초의 메이커 스페이스다. 토고 건축가 세나메 코피 압도지누가 만든 이 공방은 폐전자제품 부품으로 3D프린터를 만들어 그것으로 필요한 물건들을 찍어낸다. 전세계에서 쏟아져 나오는 전자제품 쓰레기가 가장 많이 흘러 들어가는 곳이 아프리카다. 우랩은 현지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폐전자제품을 활용함으로써 자원을 재생하고 부가가치를 만들고 있다. 토고의 스타트업, 디자이너, 기업가들에게 우랩은 시제품을 만들고 아이디어를 구현해 볼 수 있는 둥지 역할을 한다. 지속 가능한 기술과 지역 환경을 활용해 도시 재생을 촉진하는 것이 우랩의 목표다. 이 모든 과정은 크라우드 펀딩과 오픈 소스로 진행한다. 누구나 자기가 쓸 3D 프린터를 직접 만들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활용해 드론, 농사용 다기능 로봇도 만들 계획이다. 농사용 다기능 로봇은 파종, 쟁기질, 물 주기를 다 해낼 수 있는 장비로 개발 중이다. 전체 인구의 60%가 빈곤층인 토고에서 지역 자원과 오픈소스로 만드는 3D프린터는 자급과 발전의 디딤돌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모으고 있다.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에도 우랩 같은 공간과 활동이 퍼지고 있다. 케냐 수도 나이로비의 팹랩은 농부들을 위한 적정기술 워크숍에 3D프린터를 적극 활용한다. 탄자니아의 부니 헙(Buni Hub)도 폐전자제품으로 3D프린터를 만들었다.
내전으로 두 팔을 잃은 아프리카 남수단의 소년을 위해 3D프린터로 전자의수를 만들고 만드는 방법을 현지 주민에게 전한 미국 비영리기구 ‘낫 임파서블 랩’(Not Impossible Lab)의 ‘다니엘 프로젝트’도 메이커들이 해낸 적정기술의 성과 중 하나다. 엔지니어, 신경과학자, 디자이너 등이 힘을 합쳐 100달러짜리 의수를 개발했다. 다니엘처럼 팔을 잃은 아이들이 5만명이나 되는 이 나라에서 싸고 직접 만들 수 있는 전자의수처럼 반가운 선물은 없다. 다니엘은 현재 병원에서 전자의수 만드는 일을 돕고 있다.
적정기술 운동이 시작된 지 반 세기가 됐지만, 썩 대중적이지는 않다. 한국에서는 개도국 대상의 기술 지원 활동이나 생태운동가들의 관심에 그치다가 2000년대 들어 귀농, 귀촌이 늘면서 덜 낯설어졌다. 일정 수준의 자급자족을 하는 데 필요한 생활기술로서 적정기술을 찾고 익히는 사람이 많아진 덕분이지만 여전히 주류는 아니다. 에너지자립마을을 추진하는 지자체들도 적정기술을 주목하고 있다. 친환경 난방과 주택, 에너지에 주로 쏠리던 적정기술이 최근에는 사회문제 해결로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다문화가정, 장애인, 노약자 등 기술 접근성이 떨어지는 집단과 개인을 위한 적정기술은 이제 싹이 트려는 단계다.
적정기술에 집중하는 메이커 모임도 생겼다. 크리에이티브 톤(Creative Thon)은 올해 4월 출발한 적정기술 기반 메이커 커뮤니티다. 공학도 출신으로 대학 시절부터 적정기술과 ICT에 관심을 갖고 만들기를 해온 유효석(29)씨가 이끄는 이 모임은 대전을 중심으로 서울, 광주, 대구에서 지역별 커뮤니티가 활동하고 있다. 개도국 대상의 국제 개발 협력, 장애인을 위한 적정기술이 주 관심사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외국인과 내국인이 함께하는 활동으로 공감과 교류의 폭을 넓히고, 네트워킹과 소통에 힘쓰는 것도 이 모임의 특징이다. 이제 시작 단계라 뚜렷한 성과는 아직 없다. 하지만 개방과 공유, 협력에 바탕을 두고 적정기술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이들의 꿈은 강렬하다. 중학생부터 60대까지 수백 명의 회원(페이스북 900명. 네이버카페 회원 400명)이 동행하고 있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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