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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역사도 세상 바꿀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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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인력(引力)이 강한 영화들이 있다. 관객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고 발걸음을 조급하게 만든다. 그 인력이 출연 배우이거나 영화의 장르이거나 막대한 제작비일 수도 있지만, 그 모두를 압도하는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 개봉 열흘 만에 4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밀정’에서는 김지운 감독(52)이다. 관객이 이 영화를 기대하거나 만족하는 지점엔 반드시 김 감독이 있다.
‘악마를 보았다’(2010) 이후 미국 할리우드로 건너가 ‘라스트 스탠드’(2013)를 만들고 3년 만에 돌아왔다.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 감독은 빠르게 불어나는 관객수에도 “일희일비하지 않으려 한다”며 평정심을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다만 “스태프의 헌신과 열정에 이 영화가 보답을 해줄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밀정’은 1920년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과 이들의 뒤를 쫓는 일본경찰 사이의 암투를 그린다. 과거 임시정부에 몸 담았던 조선인 출신 일본경찰 이정출(송강호)이 상부의 지시로 의열단에 접근했다가 도리어 밀정으로 포섭되기까지, 그의 인간적 고뇌와 선택의 지점들을 차분히 따라가며 시대의 공기를 스크린에 녹여냈다. 밀정들이 암약하는 공간으로 새롭게 탄생한 경성과 상하이의 화려하고도 쓸쓸한 풍경은 영화의 무드를 만든다.
‘장화, 홍련’(2003)과 ‘달콤한 인생’(2005)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악마를 보았다’ 등 김 감독의 전작들에서 미적 감흥과 장르적 쾌감 조우가 이뤄졌다면, ‘밀정’에선 정서적 울림의 확장을 경험하게 된다. “차가운 누아르를 만들려 했지만 결국엔 뜨거워질 수밖에 없었다”는 김 감독의 얘기를 들었다.
“밀정은 시대의 모순을 드러내는 존재”
‘밀정’은 1923년 ‘황옥 경부 폭탄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의열단이 일제의 주요 거점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국내로 폭탄을 들어오려다 발각된 사건이다. 송강호가 연기한 이정출은 당시 이 사건에 연루된 조선총독부 경기도경찰부 소속 황옥 경부를 영화적으로 각색한 인물이다. 황옥 경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황옥이 재판 과정에서 자신을 의열단에 잠입한 일제의 밀정이라 주장했다는 기록이 있는 반면에 황옥이 의열단의 단원이었다는 증언도 여럿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여러 인물과 사건들 중에서 황옥 경부 폭탄사건에 주목한 이유가 궁금하다.
“황옥은 친일인지 항일인지 결론 나지 않은 인물이다. 그의 불분명함이 흥미로웠다. 그 시대의 모순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라고 봤다. 독립은 불가능하다는 회의적 전망을 갖고 있으면서도 변절에 대한 마음의 빚으로 인해 내면에선 계속 갈등하는 인물을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이정출이 시대의 순풍과 역풍을 번갈아 맞으며 어떤 행로를 걸었는지 따라갔다. 그리고 결국엔 어떤 역사에 이름을 올릴지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되는데, 그 선택의 윤리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정출의 드라마틱한 변모가 투철한 신념에 의한 것 같지는 않다.
“영화 도입부에서 임시정부 시절의 사상적 동지였던 김장옥(박희순)을 적으로 만난다. 더구나 그가 눈앞에서 자결하지 않나. 회한을 느꼈을 거다. 또 김장옥과의 인연은 의열단 핵심 멤버인 김우진(공유)과 연결되는 매개가 된다. 이정출이 처음엔 의열단에 잠입하라는 총독부 경무국 부장 히가시(츠루미 신고)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지만, 작전의 주도권이 하시모토(엄태구)에게 넘어가는 분위기에서 엄청난 압박감과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 혼란 속에 의열단 단장 정채산(이병헌)이 이정출에게 손을 내밀며 다가온다. 히가시도 말하지 않았나. ‘남자는 자기를 인정해주는 사람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다’고. 이정출이 의열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시대가 몰아갔다고 본다.”
-이정출은 대사보다 표정과 행동에서 성격이 드러난다. 그래서 때론 모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밀정’은 배우가 어떤 상황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방식의 영화는 아니다. 배우의 시선과 표정의 서사로 이야기가 진행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사보다는 침묵에 개연성을 부여하려 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의 예술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속 이정출의 표정을 그래프로 그려보면 차갑게 굳어진 지점들이 분명 존재한다. 히가시의 사무실에서 김장옥 관련 서류를 들춰보던 장면 같은 것들이다.”
-그런 점에서 송강호 캐스팅은 최고의 선택 아닌가.
“송강호는 차가운 연기를 보여주는데도 깊은 울림을 주는 배우다. 이런 배우는 대한민국에송강호 한 명뿐이다. 정말 독보적이다. 스파이극인데 너무나 인간적인 스파이극이란 얘기를 듣는 것도 송강호 때문 아닐까 싶다. 송강호가 연기한 인물을 통해 그 시대의 풍경을 들여다봤다는 의미니까. 송강호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인 것 같다.”
-송강호라는 명배우가 있다고 해도 대사가 아닌 다른 도구로 거대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게 연출자 입장에선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영화 속 공간을 구성하는 사물의 형태와 색감, 소리 등 모든 것들이 인물의 마음상태를 결정짓는다고 생각한다. 그 요소들을 하나도 간과하지 않고 거기에 인물의 심리를 반영하려 했다. 예를 들면 이정출의 발걸음 소리도 세 걸음까지는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네 번째 걸음에는 울림을 넣기도 했다. 내면의 변화를 드러내기 위해서다. 24분의 1초에 해당하는 프레임을 넣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도 엄청난 고민을 했다. 그 차이를 모두가 느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차이를 포착한 누군가는 감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나도 그랬기 때문이다. 카메라, 음악, 조명, 연기 등 모든 영역에서 그런 작은 요소들이 융합돼 영화를 이룬다고 본다. 그 과정은 엄청난 정신노동이면서 육체노동이었다.”
-전반부는 첩보물의 장르적 특성이 강했다면, 이정출의 노선이 정리되는 후반부부터는 감정적 호소가 두드러진다.
“내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저렇게 모진 고문과 압박을 견디며 의로운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게 되더라. 그래서 의열단이 생존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순간부터는 영화가 뜨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인간으로서 한계를 뛰어넘게 하는 불덩어리를 가슴에 품고 있어야 그런 행동들이 가능한 거니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자연스럽게 영화도 달아올랐다.”
“현장에선 피가 도는 느낌, 그래서 영화를 만든다”
‘밀정’은 김 감독의 필모그래피의 연장선상에 놓이면서도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달콤한 인생’이나 ‘악마를 보았다’에선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더라도 감정에 개입하진 않았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같은 시대물에선 오히려 시대상과 정서에서 동떨어진 새로운 장르를 변주했다. 그런데 ‘밀정’에선 시대와 밀착해 인물의 감정적 행로를 바짝 뒤쫓았다. 비극적인 현실에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엔딩 장면은 김 감독의 ‘쿨한 태도’에 비춰보면 언뜻 판타지 같기도 하다. 어쩌면 김 감독이 가슴에 품은 불덩어리가 드러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밀정’이 다룬 시대와 인물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민주화도 이뤘고 경제 발전도 이뤘지만 여전히 사는 건 힘들다. 사회적 문제도 많고 청산되지 않은 역사도 있다. 하지만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에도 쓰러지지 말고 한 걸음이라도 나아가야 한다고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었다. 그것이 진전이고 진보라고 본다. 실패한 역사에 주저앉았다면 오늘은 없었을 것이다. 실패를 통해서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내레이션을 처음으로 이 영화에 넣은 이유이기도 하다.”
-‘밀정’을 계기로 이후 작품 세계에도 변화가 있지 않을까 싶다.
“과거엔 영화 안에서 스타일을 과시하거나 전시하려 했다면, ‘밀정’에선 인물이 어디로 가는 게 맞는 것인가를 먼저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영화를 만들 때 불필요한 소모가 없어졌다. 스태프들과 명확한 디렉션을 공유하고 성취를 얻는 프로세스가 만들어졌다. 영화를 만드는 방식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바뀌었다고 해야 할까. 다음 영화에선 좀 더 완성된 시스템이 정착되지 않을까 싶다.”
-영화를 막 개봉했으면 지칠 법도 한데 어디에서 창작열을 얻나.
“이렇게 힘든 일을 어떻게 계속하고 있나…. 고통스러울 때는 별 생각이 다 든다. 그런데 아무리 되짚어봐도 내가 하루 12시간씩 몰입할 수 있는 일이 영화밖에 없다. 평소에는 감추고 있던 온갖 감정들이 현장에선 살아난다. 노심초사, 안절부절, 감탄, 감동, 탄식 같은 감정들이 영화를 통해 어떠한 이미지와 형태로 만들어지지 않나. 일상은 무덤덤한데 현장에만 가면 피가 도는 느낌이다. 그 짜릿함 때문에 영화를 계속 만들게 되는 것 같다.”
-관객은 창작자에게 늘 새로운 걸 요구한다. 잘하던 걸 더 잘하는 것도 대단한 일인데 말이다. 창작의 고통을 느낄 땐 어떻게 극복하나.
“영화를 만드는 건 보이지 않는 적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다양한 취향과 개성을 지닌 관객들을 만족시켜야 하는 일이니까. 영화 ‘라비앙 로즈’를 보면 에디트 피아프가 탈진한 상태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 ‘관중의 함성이 들려오는데 어떻게 내가 노래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어렴풋하게나마 ‘감히’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나를 곧추세우고, 미진한 점을 복기하고, 새로움을 모색하면서, 나를 부르는 저 소리에 뭐라고 응답할지 늘 고민하고 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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