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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애들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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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라스베이거스는 뷔페도 유명하다. 가장 잘 나간다는 곳을 굳이 찾아갔다. 보통 12세 이하인 어린이 할인 대상이 8세 이하란다. 계산대에 따져 묻자 돌아온 답은 “I don`t know.” 얼마 먹지도 않을 아홉 살 아들을 생각하니 5달러가 아까웠다. 그리고 44년 인생에 가장 깊은 울림을 준 대화가 시작됐다.
“오늘만 여덟 살이라고 하면 안 될까?” “제 통장에 얼마 있어요?” “(이건 뭐지) 100만원 정도, 왜?” “그럼 제가 줄게요.” “생일 지난 지 3개월밖에 안돼서 아직 8세라고 해도 되거든(사사오입 변주), 네 세뱃돈 용돈 모은 거지만 아빠는 네 사촌동생들에게 그보다 더 많이 썼거든(본전생각).” “아빠, 돈은 다시 벌 수 있지만 거짓말은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네가 돈을 벌어봤어’라는 대뇌의 반격을 급히 멈추고, 깨끗이 사과했다. 다섯 배나 더 살았다는 걸 앞세워 그간 아이에게 행했을 독선과 강요, 변명, 거짓들이 부끄러웠다. 그날 이후 아이든 후배든 아랫사람을 대할 때면 저 대화가 금과옥조처럼 되살아난다.
지인들은 고백한다. “쓰레기 버리지 마세요” “무단횡단 하지 마세요” “제한속도 지키세요” “운전하면서 전화하지 마세요” 등 제 아이들의 입바른 얘기를 얼렁뚱땅 넘기거나, 되레 아이의 다른 잘못을 부각하는 논법으로 일단 군색한 처지나마 모면하려 했던 일상들을.
우리의 대응은 어쩌면 복잡다단한 이 사회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슬픈 궤변일지 모른다. 무엇이 옳은지 명확하나 “성공하려면” “돈을 벌려면” “너를 보란 듯 키우려면” “조직이 굴러가려면” “성과를 내려면” 어쩔 수없이 그런 옳음 따위 보류해도 된다고 서로를 다독인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고, 있는 놈들은 더한다고 항변한다.
그래서 아이들도 변해간다. 친구보다 영어등급이 높다는 걸 뽐내고, 저보다 약한 상대를 대수롭지 않게 괴롭히고, 남들과 대화할 때 마냥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배려와 정의는 성공 뒤로 미루라는 능력주의를 신봉한다. 아이의 성적이나 학력은 회자될지언정 어떤 성품을 지녔는지는 성적이 담보되지 않는 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수신(修身)과 제가(齊家)의 레퍼토리는 사회로, 치국(治國)의 현장으로 전염된다. 고령의 주차요원에게 돈을 던지는 젊은이, 청소노동자를 홀대하는 공항, 부패로 아이들 밥상을 차린 학교, 총장의 독단이 판을 치는 대학, 꼰대 문화에 찌든 직장, 실정법을 어긴 수장이 지휘하는 공권력, 법을 무시하는 입법부, 비리 법조, 상대의 허물만 물어뜯는 언론과 권력층, 입이 귀라고 착각하는 것 같은 대통령까지(너무 많아 이쯤 한다). 어디에도 애들 수준의 명징한 옳음은 없다.
“잘못은 했지만 사퇴는 못하겠다”는 어느 대학 총장과 치안총수, “잘못은 네가 더 했다”는 이전투구 기득권의 논리는 우리가 아이들에게 또는 아랫사람들에게 했던 숱한 말들과 묘하게 닮아있다. 욕하면서 배우고, 다들 그렇다고 무뎌진다.
나 역시 그랬다. 입사 초기 작은 선물도 거부했건만 언젠가부터 이번 명절 선물은 뭐가 올까 하는 생각에 퍼뜩 놀라고, 취재원에게 택시비를 안 받으려고 버스 끊기기 전 귀가하던 신데렐라에서 “한잔 더 사”라고 외치는 야수로 변해갔다.
예수는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설파했다. 켜켜이 둘러붙은 관행이라는 때를 벗기기 위해 9월 28일(김영란법 시행) 이후를 겸허히 기다린다. 지금 필요한 건 좋은 아빠, 좋은 선배가 아니다. 바른 아빠, 바른 선배여야 한다.
탐욕이 우리를 삼키고, 우리는 아이들을 삼킨다. 그런 아이들이 무엇을 삼킬까? 우리가 깨닫고 스스로에게, 아이에게, 넓은 의미의 아랫사람들에게 바르게 실행하지 않으면 차차 보게 될 게다. 더한 지옥을.
고찬유 사회부 차장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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