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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한마디에 '급선회'… 공직사회 ‘靑바라기’ 도 넘었다

입력
2016.08.1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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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진제ㆍ사드ㆍ대구공항 등 사안마다 춤추는 정부정책

대통령 한마디에 소신ㆍ입장 꺾고 정책 급선회

대통령 독주와 공무원 ‘新복지부동’ 악순환 갈수록 심화

전문가 “책임장관제ㆍ부총리 총괄 기능 강화 필요”

박근혜 대통령이 8일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이 8일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에어컨을 하루 12시간 틀면서 전기료를 싸게 낼 방법은 없다.”

전국에 폭염특보가 발효됐던 지난 9일 채희봉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자원실장은 “여름 전력 수요를 낮추려면 누진제가 필요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1994년과 비견되는 ‘역대급 더위’를 맞아, 에어컨 좀 더 틀게 누진제를 개편해 달라는 여론의 요구를 단칼에 잘랐다. 그때만해도 정부 입장에 재고의 여지는 없었다.

하지만 그 ‘대쪽 소신’은 불과 48시간도 지속되지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11일 새누리당 지도부 오찬에서 가정용 전기요금의 누진율을 낮추기로 했다. 주무 부처가 의사결정에서 배제된 채 당청 간 논의로 결론이 난 셈이다. 산업부가 한 일은 그날 오후 서둘러 ‘주택용 누진제 요금 경감 방안’을 내놓은 게 전부였다.

정부 각 부처가 나름의 이유로 여론 압박에도 고수하던 각종 정책이 청와대와 여권의 말 한 마디에 달라지는 사례가 최근 반복되고 있다. 전기요금 누진제와 같은 특정 부처의 금과옥조도,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후보지처럼 국가안보와 직결된 정책도 마치 ‘바람 앞의 갈대’처럼 오락가락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여론엔 귀를 닫고 청와대만 바라보는 공직사회의 이런 ‘신(新) 복지부동’이 선거를 앞둔 정권 말기로 갈수록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을 우려하고 있다.

당청 입김에 중심 못 잡는 정부

대통령의 한 마디에 부처의 입장이 뒤집힌 사례는 비단 전기요금 누진제의 경우만이 아니다. 대기업 집단 기준(기존 자산총액 5조원)을 상향 조정하는 문제를 두고 애초 공정거래위원회는 ‘검토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공정위는 지난 4월3일 보도해명자료에서 “현재 기준 상향 여부 및 방법ㆍ시기에 대해 검토ㆍ결정한 바 없다”고 밝혔다. 여기엔 “10개 부처와 38개 관련 법률에 걸쳐 의견을 조율해야 해 단기간에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작용했다. 그러나 같은 달 26일 박 대통령이 언론사 편집ㆍ보도국장 간담회에서 “현행 대기업 지정제도는 반드시 시대에 맞게 바뀌어야 된다”고 강조하자, 공정위는 언제 반대했었냐는 듯 얼마 후 기준을 자산총액 10조원으로 올렸다.

지역 민원과 환경보존 문제 등에 얽혀 장기간 결론을 내지 못하던 난제들에도 대통령의 한마디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사업은 환경부 산하 국립공원위원회가 2012년과 2013년 두 차례나 ‘생태계 파괴 우려’를 들어 부결시켰던 사안이었다. 경제논리와 환경논리가 맞부딪친 전형적으로 묘안을 찾기 어려운 과제였지만 박 대통령이 2014년 “평창 올림픽에 맞춰 조기 추진됐으면 한다”고 발언한 이후, 정부는 상부 정류장의 위치만 바꿔 재추진하는 방향으로 급선회했다.

춘천~속초간 고속철 사업 역시 막대한 재정부담을 들어 정부는 애초 민간자본 유치 방식의 추진을 검토했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이 같은 배경은 마치 모르는 듯, “수십년간 지역주민이 애타게 원하는데도 과거의 틀에서 타당성을 인정받지 못했던 사업”의 사례로 언급하자 국토교통부는 지난 7월 이를 “정부 재정사업으로 추진하는 방향을 우선 검토하겠다”고 나섰다.

그나마 전기요금 누진제나 대기업 집단 기준 등은 부처의 소극적 태도가 여론의 지탄을 받던 사안을 대통령이 결단해 풀어낸 측면도 있는 것으로 평가 받는다. 반면 대통령이 개입하며 문제가 더 꼬이거나 사안이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 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드 배치 문제가 대표적이다.

국방부는 지난달 13일 경북 성주군 미사일 포대를 사드 부지로 발표한 뒤, 성주군민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레이더가 인체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이달 4일 새누리당 대구ㆍ경북(TK) 의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새로운 지역이 있다면 면밀하게 조사하겠다”며 ‘제3의 장소’ 가능성을 시사하자, 국방부는 “성주군이 다른 부지의 가용성 검토를 요청한다면 평가 기준에 따라 검토하겠다”며 물러섰다.

대구공항 이전 문제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지난 6월 영남권 신공항을 두고 가덕도와 밀양이 경합할 당시 정부는 “탈락 지역 민심을 무마하려 별도 특혜를 주지 않을 것”이라 거듭 밝혔고, 국토교통부도 “대구공항 이전 문제는 대구시 등이 알아서 할 문제”라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지난달 11일 박 대통령이 “이전이 조속히 될 수 있도록 추진해 달라”고 주문하자, 정부는 바로 관계부처 태스크포스(TF)팀을 만들어 이전을 추진했다.

대통령 발언 때문에 부처가 과잉대책을 내놓는 경우도 생기는데, 지난 5월 미세먼지 문제와 관련해 대통령이 “특단의 대책”을 주문하자, 환경부가 고등어 구이의 미세먼지를 강조하거나 경유에 붙는 세금 인상을 검토했던 것 등이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

청와대만 바라보는 해바라기

과거 ‘복지부동’은 관료가 해야 할 결정을 미루면서 몸을 사리는 것을 가리켰다면, 최근엔 정책의 근간이 돼야 할 민심 대신 청와대의 의중만 바라보며 권력자 구미에 맞는 정책에 골몰하는 쪽으로 양상이 변하고 있다. 인터넷이 발달해 여론의 동향을 파악하기가 과거보다 훨씬 쉬워졌음에도, 관료집단의 전문성이 존중 받지 못하다 보니 정책의 ‘효과’ 대신 ‘뒷탈’만을 염두에 둔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병대 한양대 교수는 “부처가 세종시로 간 것도 이런 현상이 심화된 원인 중 하나”라며 “공무원이 서울에 있을 때보다 여론을 들을 기회가 없으니 청와대에 더 목매게 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런 신 복지부동의 부작용은 심각할 수 있다. 같은 현상이 계속되면 결국 정부 정책 전반에 신뢰도가 떨어지게 된다. 정부가 특정 사안에서 입장을 고수하더라도, 이에 불복한 이해 당사자가 정부 말을 신뢰하지 않은 채 청와대ㆍ여당을 상대로 읍소하거나 위력을 행사하며 정책을 뒤집으려 할 수 있다. 김형준 경희대 인문교양학부 교수는 “최근 청와대의 잦은 정책 뒤집기는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취약한 정부에서 나오는 대표적 현상”이라 평가하며 “정책의 예측 가능성이 떨어지면 사회적인 추가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결국 국민이 피해를 본다”고 지적했다.

청와대가 일선 부처를 희생양 삼아 날선 여론을 피해가려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한 경제부처 관계자는 “전기요금 누진제 같은 사안에 대해 담당 부처가 청와대와의 사전 조율도 없이 기존 입장을 유지한다고 버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공직사회가 여론이 아닌 청와대만 바라보는 현상은 정권 말기로 갈수록 더욱 심해질 가능성이 크다.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당과 청와대가 표심에 더욱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여론 움직임에 따라 각 부처의 기존 입장ㆍ정책을 뒤집는 일이 빈발할 것이라는 얘기다. 지금처럼 대통령만 바라보는 정부 조직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대통령이 직접 나서 얽힌 실타래를 푸는 상황이 반복될 경우, 결국 ‘청와대의 독주’와 ‘부처의 복지부동’ 간 악순환만 심화될 거란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최병대 교수는 “권력이 정점을 지나면 공직사회도 어차피 새로 더 할 게 없으니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 문제만 만들지 않고 따라가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각 부처 장관에게 권한과 책임을 보장하는 식으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고 지적한다. 윤태범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결국은 대통령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권한을 분산시키고 책임장관제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조언했다.

경제 현안에서 부총리의 총괄ㆍ조정 기능을 좀 더 보장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창원 한성대 교수는 “경제부총리라면 경제와 관련한 모든 일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며 “경제 현안에서 부총리의 역할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세종=이영창 기자 anti092@hankookilbo.com

세종=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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