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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덕 칼럼] 냉전과 신냉전

입력
2016.08.11 15:06

잘 알려져 있듯이, 냉전은 제2차 대전 이후부터 20세기 말엽까지 당시의 초강대국 미국과 소련이 세계를 각자의 진영으로 재편한 채, 직접적 교전 없이 군사적 긴장 관계만을 유지하던 상태를 지칭하는 역사 용어다. 여기서 유추하여, 최근의 국제질서를 신냉전으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고 있다. 동아시아의 경우, 근래 미국과 중국의 대립 심화, 그리고 한ㆍ미ㆍ일 대 북ㆍ중ㆍ러의 블록화 양상으로 인해 이런 움직임이 더 큰 설득력을 얻는 듯하다. 특히, 세계 최대의 물류길 남중국해를 둘러싼 미ㆍ중 간의 신경전, 미국의 한반도 사드 배치 계획과 중국의 반발 등은 흡사 20세기 후반의 국제정치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냉전 시대를 면밀히 고찰해 본다면, 신냉전이라는 역사적 유추의 적절성에 대해 심각한 의문이 들 수 있다. 그 시대의 미소 대립과 현재의 미중 갈등에는 몇 가지 근본적 차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첫째, 과거 냉전은 우선적으로 이념 대결이었다. 양대 초강대국은 삶의 방식과 경제 체제를 놓고 경쟁하였고, 그 우위성을 선전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따라서 냉전 시대에는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신념 체계의 유지 및 전파가 핵심 과제였다. 일례로, 미국과 소련이 전 세계를 상대로 유학생 유치 노력을 기울였던 것은 이 까닭이었다. 미국 풀브라이트 장학 프로그램이나 소련 루데엔(민족우호대학)은 그들 진영 내부에 체제 친화적 엘리트를 지속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대표적 기제들이었다. 엘리트를 넘어선 일반 대중의 ‘이념화’ 작업도 활발했다. 이에는 주로 양국의 문화가 적극적으로 동원되었는데, 흥미롭게도 미국은 청바지, 콜라, 할리우드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를, 소련은 고전음악과 공연예술 등의 고급문화를 더 자주 내세웠다. 그리고 양국은 상대방 문화 차단, 즉 자기 진영이 되도록 반대편의 문화를 접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도 열심이었다. 미국 진영에 속한 우리나라 음악애호가들은 20세기 최고 피아니스트 구소련의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의 공연을 냉전 종식 이후에야 직접 볼 수 있었다.

둘째, 냉전 시대 각 진영은 경제적으로 상호배타적이었다. 미국 또는 소련 진영에 속한 나라들은 각각의 경제권 안에 묶여있었으며, 그 경계를 넘어서는 교역은 매우 제한적인 수준에서만 이루어졌다. 물론, 최근 연구들로 당시 서방과 동구권 간 경제관계가 예상보다 긴밀했음이 드러나긴 했지만, 이 역시 그 교역 규모 면에서는 대단치 않았다. 동아시아에서는 자유진영과 공산권 간의 경제교류가 더욱 미미했다. 우리의 경우, 제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설계한 동아시아 경제권, 즉 일본이 공산품 생산과 식량 및 원료 소비를 하는 중심부로, 동남아시아가 반대 역할의 주변부로 기능하던 체제에 속해 있었기에, 소련, 중국, 북한을 포함하는 권역과의 교역은 불가능했다.

셋째, 사실상 준전시 상태였던 냉전은 특정 진영 소속 국가가 이로부터 ‘탈영’하거나 그런 조짐을 보일 경우, ‘군사’ 제재가 수반될 수 있던 시대였다.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자율적 외교 행보 모색과 ‘자본주의화’ 노선을 감내하지 않았다. 미국 역시 진영 이탈 움직임에 민감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1973년 칠레의 진보 정권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군부 쿠데타를 지원했던 것이나, 1981년 니카라과에서 사회주의 성향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이 정권을 장악하자 이에 대한 반군을 조직했던 것은 그 두드러진 예였다.

이런 냉전과 달리, 오늘날 동아시아에서의 미ㆍ중 대립은 위의 요소 모두를 결여하고 있다. 과거처럼 강대국이 자기 진영 국가에게 강제했던 이념적 속박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 활동 역시 각 진영 내부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뿐더러, 어느 한편에만 의존하지도 않는다. 지금은 진영 내 독자 행보를 군사 개입으로 막을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강대국 주변의 국가들은 최대한 자기 국가이익의 관점에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가진 셈이다. 게다가 이들은 강대국 간의 ‘탈냉전적’ 대립을 이용하여 외교적 실리를 얻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현재의 동아시아 정세를 1960, 70년대 식 냉전의 프레임을 통해 파악하는 듯하다. 그들은 북한의 도발 위협에 대한 강박관념 속에서, 구공산권 국가들을 여전히 과거의 잔상을 가지고 바라본다. 과거 적군 진영에 대한 대응은 지나치게 딱딱하며, 반대로 냉전 시대 아군 진영에는 특별히 살갑다. 우리가 21세기에 살면서 1960, 70년대에 사고가 머물러 있는 국가원수를 모신(?) 지 내년이면 10년이다. 첫 번째 5년이 인프라 투자와 경제성장을 동일시하는 개발시대의 단순 논리를 답습했다면, 두 번째는 안보, 국민 통제, 진영 결속에 집착했던 과거 냉전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다. 과거를 학습함으로써, 과거로부터 편향된 교훈을 얻기보다는 과거가 현재와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하는 인물을 다음번에는 기대해 볼 수 있을까.

노경덕 광주과학기술원 교수ㆍ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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